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마감시간 놓친 깐마늘의 최후

아는 만큼만 보이는 세상 하루 사이에 목 깊숙이 들어온 마감의 비수 네 개 중 세 개를 걷어내니 조금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는 계속 찔러 들어오고 있는 상황. 사실은 칼날 네 개에 찔리든 한 개에 찔리든, 찔리면 죽는 겁니다. 게다가 가장 끝내기 어려운 것을 가장 뒤에 밀어 두었던 것이죠. 이젠 시간 계산이 필요합니다. 오늘이 마감이라지만 최대한으로 늘리면 내일 한국에서 담당자가 출근해 컴퓨터를 켜는 시간까지…… 열 시간쯤 남은 겁니다 두 자리 수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살짝 안도감이 생깁니다. 마치 한숨 안자고도 그 열 시간을 완전히 쓸 수 있는 수퍼맨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죠 사실 어제도 마감 원고 두 개를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잠깐 여유가 생겼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

부조리한 마감엔 저항이 답이지!

마감의 심리학 원고 마감에 쫓겨 거의 막판에 이르면 어느 순간 논리적으로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그 마감시간에 대한 전후 인과관계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면서 마감을 맞추지 못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분명해지고 이 모든 건 다 마감시간을 이렇게 정한 저 놈들의 음모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궁극적으로 정신승리에 이르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내가 이 원고 하나만 쓰는 게 아니라 이번 주말에 마감이 네 개씩이나 몰린 건 저 쪽에서도 꼭 이해해 줘야 하는 일이야. 이런 와중에 금요일 밤 식사약속도 아니고 미팅을 잡은 놈은 아마 내가 이런 상황이란 걸 알고 엿먹으라고 그랬을 게 틀림없어. 아니, 가만 있어 봐. 기본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두 기관이 하나는 20일, 다른 하나는 21일을 마감일로 한다는 것 자체..

기본 표정 관리

그게 웃는 거야? 예전에 차를 몰고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난 개찰구에 앉은 여성 주차직원에게 엷은 미소를 띄워주려 했습니다. 물론 요즘 들어갈 때는 무인 개찰구를 지나고 나갈 때 비로소 직원을 만나 주차비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꼭 여성이 아닌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나갈 때도 무인 스캐너와 씨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죠. 그래서 무척 오래된 얘기인지는 몰라도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활짝 웃으며 표를 받는 어린 여성에게 죽일 듯 딱딱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빨을 드러내며 큰 미소를 짓는 건 과유불급이죠. 어떤 사람은 그게 더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난 내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대에게 거만해 보이거나 전혀 무관심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대가 ..

설교시간에 졸지 않는 법

부작용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는 순간 왜 그렇게나 눈꺼풀이 무거워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건 당연히 잠이 부족해서다. 하지만 왜 밥 먹을 때, 운전할 때, 일할 때는 졸리지 않다가 설교가 시작되는 순간 오지에서 핸드폰 신호 끊기듯 오감에 노이즈가 발생하며 의식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려는 것일까?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동생이 군목 대령인데? 그런 족보는 결국 아무 관계가 없고 기본적으로 설교시간엔 내가 뭘 하는 게 아니라 목사님이 뭔가 하는 걸 장시간 지켜봐야 하는 게 문제였다. 수영 동작을 멈추면 가라앉아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또 의문이 든다. 지금은 지구촌교회 원로목사가 되신 이동원 목사님이 예전 동국대 뒷문의 우리 교회 담임목사를 하실 때엔 설교 끝나는 게 아쉬워 ..

오해 2

오해 2 세상 살다 보면 피치 못하게 상대방과 한바탕 붙어야 할 경우가 생깁니다 정도에 따라 때로는 육체의 대화로 번지기도 하지만 나이 들면서 대개는 말로 끝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마음 속 응어리의 쓰라림은 터진 입술보다 오래 가는 법이죠. 한바탕 다툰 끝에 등을 돌리게 된 상대방과는 한동안 꼴도 보기 싫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슬쩍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지는 게 인지상정일까요? 2014년부터 1년 좀 넘게 베트남 이주 가능성을 점치며 그쪽 시장을 개발해 보려 애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년쯤 알았던 후배와 그곳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받았는데 그 끝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오기만 하면 다 책임져 줄 테니 몸만 오라는 사람들은 정말 그럴 마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성..

오해1

오해1 오해가 잘못된 선입관을 낳고 결과적으로 오류 투성이의 세계관을 낳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고 다른 사람이 이상한 현실판단을 할 때 속으로 얼마나 혀를 차며 비웃었는지 모른다. 1995년 쯤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초급 문법책을 세 번쯤 읽고 자카르타에 들어왔을 때 우리 창고장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한없이 센 놈들이야. 뭘 물어봤을 때 그걸 모르면 순순히 모른다고 하질 않고 자긴 아는 게 좀 모자란다....곧 죽어도 이런 식으로 대답한단 말이지. 알긴 아는데 완전히는 잘 모른다? 내가 보기엔 전혀 모르던데?" 띠다따우(Tidak tahu)라 대답해야 하는 걸 꾸랑따우(kurang tahu)라 대답한다는 걸 두고 한 말이다. Tahu는 알다,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