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남의 집에선 도둑을 잡아줘도 욕을 먹는다 본문
의지보다 위치
금난새 지휘자처럼 어떤 조직의 리더나 말에 힘이 실릴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개선책을 제시하고 개혁을 주도한다면 성공할 개연성이 매우 크지만 입지가 굳건하지 못한 사람이 뭔가 개선하려 하면 온갖 반대가 무성하고 네가 뭘 아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조직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어떤 개혁을 이끄는 것도 대개는 그 주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조직을 구축하여 그조직의 최정점에 선 사람은 그간 자신의 이룬 성공이 가장 우선시하는 성공사례여서 그간 자신의 훌륭한 경험이 오히려 아랫사람들이 참신한 의견을 모두 커트해 버리는 악성 필터가 되곤 합니다. 요컨대 꼰대가 되어버리는 거죠.
오래 전 한 지인이 자기 회사를 나한테 맡기고 본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수습할 당시 근무시간 내내 대놓고 주식이나 외환거래창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딴 짓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퇴근한 척 하고서 회사건물(루꼬)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내가 퇴근하고 나면 회사 자재를 이용해 자기 사업을 하던 영업직원 한 명과 회사돈을 유용, 횡령하는 경리직원과 대립하다가 결국 해고해버린 일이 있습니다. 그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한테 이렇게 도전해 왔습니다.
"이제 1년도 안된 당신하고 5년 일한 나를 두고 전사장이 누굴 더 믿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 친구들이 한 일들은 모두 물증이 남았으니 누구 말을 믿고 말고 할 상황은 아니었죠. 그 물증들을 들이밀자 그 친구들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하면서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전사장에게는 그 물증들을 첨부해 상세한 상황보고를 했죠. 하지만 전사장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내 손발 다 잘라버리고 어떻게 일하겠다는 거야? 그게 당신 회사인줄 알아?"
남의 회사에서는 도둑을 잡아도 욕을 먹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전사장은 그들이 도둑인줄 알면서도 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깊은 뜻을 내가 몰랐던 건지도요.
최근 한인회 주도의 공동작업을 할 때에도 좋은 의견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방구 깨나 끼며 큰 소리 내는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더욱 먹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면서 깨닫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내가 혹시라도 좋은 생각과 훌륭한 개선책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개진하기 전에 그 말이 먹힐 만한 '위치'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상류에서 수질이 개선되어야 하류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삼각주에서 수질을 개선해 봐야 바로 바다로 빠져나가 흩어질 뿐입니다. 어쩌면 한국이나 인류사회는 치료불가능한 꼰대들이 상류에서 독을 푸는 구조인 거고 그래서 그나마 상류까지 올라가 다른 꼰대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준비해 간 세정제를 굳건히 투하하는 몇 안되는 현인들이 칭송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의지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관철할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란 걸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2021.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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