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아름다운 여행 여행을 떠나는 게 간단치 않습니다. 코로나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가장 큰 타격을 입고 많은 변화를 보인 게 관광과 여객운송 쪽인 듯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비행기나 열차를 타기위한 규제와 조건이 많이 바뀌어 왔는데 작년 11월 데일리인도네시아가 양도해 준 발리-라부안바조 팸트립을 갔을 때와도 또 뭔가 잔뜩 바뀌어서 래피드테스트와 보건부 eHac 앱을 가동시키는 데에도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데스크의 공항직원은 그것도 모르냐는 못마땅한 표정이고요. 내가 정말 여행이란 이름으로 어딘가를 다녀온 적이 있었나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인도네시아에 막 부임했던 1995년에 당시 아직 개발 전이던 롬복에 잠시 다녀왔었고 이듬해엔 족자를 갔었죠. 이후 일 때문에 인도네시아 곳곳을 다녔지만 여행이라 할 만..
빡센 하루 금요일이 바쁜 하루가 될 건 미리 예견했지만 아침 일찍 예정에도 없었던 헬렌의 요청부터 조치해 주었습니다. 헬렌은 그랜맬리아 호텔(Gran Melia Hotel)의 코리언데스크 매니저인데 한인회가 발행하는 한인뉴스에 우리가 잘 모르는 인도네시아 풍습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좋은 번역사가 붙어 헬렌의 글은 꽤 잘 읽히는 흥미로운 컬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로 된 결과물을 한인뉴스가 컬럼기고자에겐 보내주지 않는지 헬렌은 매달 나한테 링크나 다운로드 파일을 요청합니다. 아침 일찍 컴퓨터에 앉아 그 일부터 처리했습니다. 그 다음은 콘텐츠진흥원 조사보고서 용역 입찰서류 차례입니다. 3월말-4월초의 마감들을 쳐내면서, 그 사이 작년 입찰서류를 기반해 초안을 잡아달라고 인도웹 최대표에게 부..
일과 삶의 균형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 다니던 시절엔 가정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수시로 듣곤 했습니다. 그런 헛소리를 전업작가가 된 이후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버릴 각오로 문단에 들어올 생각이 있습니까?” 빈땅 병맥주 네 병째부터 A시인이 주사를 부리기 시작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난 문학을 위해 가정을 버린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등단해 글을 쓰려면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해요.” 그는 모름지기 시인들이란 괴짜여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프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자카르타에 문인이 몇 명이나 있어요? 그 사람들 중에서도 누가 당신한테 시간 내서 이런 얘기를 해주겠어요?” 그간 대충 알고 지내던 롬복에 살던 그가 2 주일가량 자카르타에서 ..
워크스테이션 첫 직장인 대기업에서는 하필이면 부서장 바로 앞자리에 꽤 오래 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그 자리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실내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던 문화 덕택이었습니다. 자카르타에서 내 사업을 하기 시작했을 땐 대기업 다니던 시절을 너무 따라했던 것 같습니다. 직원들 사무실에서 회의실과 쌤플실을 거쳐야 나오는 내 사무실은 아늑하긴 했지만 직원들과 필연적인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직원들이 있는 홀에도 미팅룸이 있었지만 내가 거기서 미팅을 하면 분위기가 별로 안좋았어요. 대기업의 상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직원들의 업무상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업무를 가중시키는 사람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한 차례 파산 후 많은 시간이..
한계란 지켜져야 하는가? 요즘 하는 일이 그래서인지 ‘한계’라 하면 곧바로 ‘마감’이 떠오릅니다. 내가 일정한 시간 안에 몇 개의 마감을 쳐낼 수 있는가? 그게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마? 그렇다면 한 달을 통틀어 최대한 쳐낼 수 있는 마감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인가? 13억 루피아짜리, 즉 소득세 떼고 한화로 계산하면 거의 1억원에 딱 떨어지는 콘텐츠 진흥원 8개월짜리 조사보고서 용역 입찰을 준비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8개월간 4개국, 7개 문화부문을 아우르는 40개의 일반보고서와 4개의 최종보고서. 결국 한 달에 4~5건의 마감이 추가되는 셈이죠. 지금도 5일과 20일에 집중된 마감들로 거의 몸부림을 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물론 팀을 구축해 수행해야 하는 일이지만 ‘팀을 짠다’라는 말에는 ‘그중 ..
제너럴리스트의 세계 어느날 내가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인간임을 깨닫던 날이 있었습니다. 학창시절과 대기업시절을 돌이켜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배우고 거기 맞춰 학력을 쌓고 토익시험을 보고 그럴 듯한 직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좀 더 유창한 영어회화와 민법과 세무실무를 배우며 자기계발을 하여 어디든 끼워 맞출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범용의 인간이 되면 취직이나 전직도 쉬워질 것이고 구세대의 인간들이 요직에서 떨려 나갈 때가 되면 그 자리를 쉽게 메울 수 있는 나 같은 제너럴리스트들의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의 동남아 외환위기와 2000년대 초반의 파산, 2000년대 중반의 국제적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그 시대가 끝나간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패자부활전을 위하여 2009년은 내가 파산의 나락에서 거의 다 빠져나왔을 시기입니다. 아이들은 2007년, 2008년에 각각 자카르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각각 싱가포르와 호주의 대학으로 진학한 상태였습니다. 연년생이어서 둘을 동시에 유학시키는 게 장난 아니었지만 당시 미용기기 수입판매가 나름 잘 돌아갔고 아내도 영어 레슨받는 학생들이 40명 정도로 거의 작은 학원 수준이었으므로 산더미 같은 빚을 갚아 가면서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도 어렵사리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내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린 게 2008년 12월 23일의 일이니 대략 그때 한숨을 돌렸던 것 같습니다. 초창기엔 블로그에 간단한 신변잡기를 썼지만 나중엔 처음 인도네시아에 어떻게 와서 뭘 하다가 어떻게 망하고 어떻게 고군분투했는지를 썼습니다. ..
스펙이 뭐라고 예전에 아들이 Habitat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던 게 기억납니다. 호주에서 대학다니던 시절 방학을 맞아 잠시 자카르타에 온 건데 그 시간을 이용해 땅그랑 어딘가에 Habitat이 집짓는 곳에 가서 일주일 쯤 일해주고 온 겁니다. 그걸 인건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했습니다. 별로 진심도 들어가지도 않고 자기 전공이 뒷받침 해주지도 않는 그런 일에 Habitat이란 유명한 NGO의 로고와 서명이 들어간 증서를 한 장 받을 목적으로 가서 일한다는 게 못내 한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게 스펙을 쌓는 일이라는데 할 말이 없었어요. 누군가의 어깨 위, 모자에 달린 소령, 준위, 상사의 계급장을 볼 때 그게 그냥 조직에서 위상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급을 받기까지 지내온 노력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