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도네시안 드림 (15)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p.15 선하게 살 수 없는 그러던 어느 날 한 인도네시아 관련 인터넷 카페에서 어떤 사람의 글을 보고 난 깜짝 놀랐습니다.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아직은 저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그 동안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참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노력과 결과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때가 되면 결실을 이루는 것이라 굳게 믿고…. 그 동안 믿음을 갖고 같이 일하게 된 분들과의 일이 잘 되어 나가고 있는 듯하여 힘이 납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한 특별한 목적의 카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근데 친목 카페가 아니라 사업목적의 카페인지라…, 회원수가 넘 없어서 썰렁합니다. 카페명 : 망간 전문 선광공장 요즘 주로 근무하는 곳이 롬복이니깐 추첨해서 롬복 여행권 드리기는 아직 ..
ep. 14.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우리가 사무실을 임대해 입주한 것은 길바닥으로 나온지 5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길바닥에서 일하는 동안 팩스나 우편물을 제대로 받을 방법이 없고 사무실이 어디 있냐는 거래선들의 질문에 좀 머뭇거려야 했지만 그런 부분은 자카르타 남부 깔리바타(Kalibata) 지역에 주택을 임대해 일부를 사무실로 쓰고 있던 릴리가 잘 커버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카르타라는 도시 전체를 사무실 삼아 오늘은 끌라빠가딩 아르타가딩 몰에서 아침 미팅을 하고 다음날은 BSD의 빠당(Padang) 음식점에서 저녁 결산을 하는 등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면서 일은 재미를 더했으므로 지루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우린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타고 자카르타를 누비고 있었지만 사무실이 없어 제품..
ep13. 꽃뱀 어느 날 오랜 만에 골프백을 차에 싣고 가딩마스 골프연습장에 갔습니다. 그곳은 양프로의 직장입니다. 그동안 바쁘기도 했고 양프로를 만나기도 껄끄러운 느낌 때문에 멀리 했던 곳이었죠. 그러나 사업이 풀려 가면서 양프로에게 맺혀 있던 감정도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피를 빨아 먹은 자카르타의 사기꾼들 중 나도 그 중 한 명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은 뭐라고 대답할 수 없네요’ 라며 가시 돋친 대답을 했었죠. 그러나 이젠 그것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양프로를 다시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성급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양프로는 요즘 연습장 안 나와요. 수라바야에 간다고 했는데…, 그리고 나서 안나온 지 몇 달 됐어요.” 연습장 카운터 여직원이 하는 말에 최..
ep12. 사랑은 변하는 것 그 즈음 소희엄마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최사장을 따라 인도네시아에 와서 40번째 생일을 지낸 소희엄마는 여전히 어리고 건강해 보였지만 예전의 활기는 거의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대신 아이들은 자카르타에 처음 올 당시 깜짝 놀랄 정도로 산만하고 불안정하던 모습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8년간 떨어져 지내던 엄마와 다시 함께 사는 것은 쉽지만은 않아 많은 진통이 따랐는데 그 중 하나는 의사소통의 문제였같습니다. 막내아들은 지극히 소극적이고 어느 정도 자폐적이라 느낄 정도였던 것에 반해 큰 딸 소희는 무척 덤벙거렸습니다. 그래서 집과 학교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일주일에 몇 차례씩 아이들 몸에 시퍼런 멍이 들 정도로 잦은 구타가 벌..
ep11. 주인 무는 개 그 즈음 류상무가 또 상해에서 날아 왔습니다. 그때 불발되어 버린 납 원석 열 컨테이너의 선적이 요원했기 때문이었죠. 에도가 바야에서 돌아온 후 대타로 대신 바야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던 최사장은 그 대신 마카사르(Makassar)와 반자르마신(Banjarmasin)을 날아다니며 망간 광산을 찾고 있었는데 내게 더 이상 동반출장부탁을 해오지 않았으므로 항상 통역이 필요한 그가 다른 누군가를 구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이제 류상무에게 현재의 바야 상황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류상무는 사트리오 거리의 맨하탄 호텔에 묶고 있었는데 뒤늦게 호텔에 간 나는 5층에 있는 한국식당 ‘미르’에서 최사장, 류상무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바야 상황 설명을 도왔어요. 최사장은 류..
ep10. 에도 그때 최사장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산만하게 진행하던 모든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망가진 상태였고 그나마 기대를 걸 수 있는 곳은 반뜬 주의 말링핑, 바야 지역뿐이었어요. 비록 메락(Merak) 톨을 통해 세랑(Serang)을 지나 편도 4시간 가까이 비포장 도로를 차로 달려야 하는 곳이었지만 그나마 최사장이 진행하던 다른 지역에 비해선 가까운 펀이었고 관리도 용이했습니다. 그러나 최사장이 그곳에 상주하려 하지 않았고 김부장이나 최사장 동생도 이미 회사를 떠난 상태였으므로 최사장은 현지에 상주하며 현장업무를 맡을 직원을 구해달라고 나에게 또 요청해 왔습니다. 마침 그때 메이의 오랜 애인이었던 에도(Edo)가 반년간의 파푸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자카르타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똘똘해 보이는 외모..
ep9. BMW 내 일이 점점 더 바빠지는 동안에도 최사장의 통역요청과 동반출장요청을 수없이 들어주어야 했지만 소희엄마 역시 그에 질세라 수많은 요청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한국에서 막 들어온 아이들을 당시 아직 끌라빠가딩의 니아스 거리에 있던 NJIS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부터였어요. 돌아온 싱글의 화려한 삶을 즐겨왔던 소희엄마에게 8년만에 아이들을 다시 슬하에 들이는 것은 무척 만만찮은 일이었겠죠. 어느 날 갑자기 다 큰 아이들 엄마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돈 만으로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NJIS 입학신청서 영어 양식의 빈 칸을 채워 넣는 것은 더더욱 돈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고요. 나라고 해서 육아와 교육에 만능일 리 없었는데 아랑곳없이 소희엄마는 내게 SOS를 쳐왔어요. 내가 짬을 내서 ..
ep8. 진실게임 발릭빠빤으로, 말링핑으로, 인도네시아 온 천지를 돌아 다니며 최사장의 납 원석 사업을 도우면서도 나도 이번만큼은 미용사업의 고삐를 더 이상 늦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H 그룹의 현지공장에 처음 부임할 당시 취학 전이었던 아이들은 내가 독립할 때 잠시 귀국했다가 각각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을 마치고서야 다시 자카르타에 합류했는데 최사장 일을 봐줄 즈음엔 큰 애가 벌써 고3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내 생활을 책임져 주지 않는 것처럼 내가 돈을 벌지 못하면 아이들 대학 등록금도 내지 못할 텐데 그런 상황이 이제 코 앞에 닥쳐와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간 노력이 빛을 보아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반둥의 큰 도매상과 거래를 트고 연이어 현지 미용업계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로레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