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어디가서 선한 영향력이라 말하려면 본문
자카르타 엑소더스
대단한 영향력을 본 적이 있습니다.
1972년에 서만수 선교사가 세운 자카르타한인연합교회가 인도네시아 1호 한인교회입니다. 2009년 소천하신 서목사님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자카르타에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두번째 한인교회는 1982년에 세워진 수라바야 한인교회입니다. 이 교회 개척에 참여한 한숭인 목사님은1988년 자카르타로 넘어와 자카르타 선교교회를 세우는데 자카르타에서 두번째 한인교회가 됩니다.여기서 많은 교회들이 파생되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한인교회사 초창기에 활약한 한목사님은 이상하게도 앞서 서목사님에 비해 평가가 낮고 심지어 악평도 꽤 많더군요.
선교교회는 몇 차례 내홍을 겪으며 열린교회, 주님의교회, 자카르타한인교회 등이 갈라져 나오는데 그중 한 무리가 2000년대 초반에 수백 명 단위로 떨어져 나와 소망교회라는 곳으로 옮겨갔다가 몇 년 후 다시 예사랑 교회라는 곳으로 옮겨 갑니다. 그 엑소더스의 중심에는 교회가 자기 성전을 갖는 것이 비성서적이라 믿는 한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가 거대한 신발공장 사장이란 게 문제였습니다.
매출이 수억불이 넘었으니 그분이 나중에 회장이라 불린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걸 안 자재업체들은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마케팅에는 여러가지 기법들이 있지만 그중엔 개종이란 특단의 방법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그분이 교회를 옮기면 따라 옮기는 게 당연했는데 그 규모가 수백 명이다보니 그들이 떠나는 교회는 당장 망해버릴 정도로 기초가 흔들렸고 그들이 옮겨들어간 교회는 십일조 수입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축복을 입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사랑교회에 왔을 때입니다. 예사랑교회는 연조가 꽤 길었지만 당시 자카르타 한인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로 구성된 교인 8명 짜리 초소형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수백 명이 들어왔으니 완전히 난리가 났습니다. 예사랑교회에 막 들어온 그분이 이미 그 교회 다닌지 8년쯤 된 나를 '새 신자'라 부르며 면담하려 하여 뽀큐를 날려주고 교회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의 엑소더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예사랑교회를 깨고 나가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자기들만의 가나안땅을 찾아 들어가 한마음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예사랑교회는 완전히 망가지고 1년 가까이 시달린 담임목사님에겐 심리적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그런 원죄를 안고 시작한 한마음교회는 지금도 성황을 이루고 모세처럼 수많은 백성을 이끌고 블레셋(소망교회)과 아말렉(예사랑교회)를 무찌르고 가나안에 들어간 그 집사님 사업은 오늘도 팬데믹 속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고 계십니다.
그런 대단한 영향력을 이전엔 본 적이 없었습니다.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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