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우리동네 천사들 (8)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p8. 그 후로도 오래동안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시간은 약이 됩니다. 1년쯤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 스텔라에게 가졌던 메이의 시린 마음도 눈 녹듯 녹아갔습니다. 그 사이 아르타가딩몰의 살롱 루디는 문을 닫았습니다. 아르타가딩몰이 개장한 이래 수익을 내지 못해 닫은 미용실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끌라빠가딩엔 이미 너무 많은 몰들이 들어차 있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텔라는 레레 등과 함께 위스마가딩 아파트(Apt. Wisma Gading) 인근의 살롱 루디 아울렛으로 옮겨 갔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고급 미용스파 체인 로저스(Roger’s)의 끌라빠가딩 지점도 문을 닫아 그곳을 그만 둔 특급미용사들이 루디에 합류하면서 그 아웃렛은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우리와도 ..
ep7. 시기심 나는 상황이 그렇다면 이제 우리 쪽에서 먼저 스텔라의 손을 놓아줘야 할 시점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미 스텔라는 자기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전엔 모든 사소한 문제들까지도 메이에게 가져와 상의하던 그녀가 이제 스스로 결정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정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말이죠. 스텔라가 아웃렛들에서 부조리와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 메단에서 센티옹까지 몇 개월간 구걸한 끝에 도착했다는 얘기, 심지어 작은 오빠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어찌 보면 스텔라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15세의 소녀가 관심을 끌기 위해 어른들을 대상으로 시네트론 TV 드라마의 학대받는 소녀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
ep6. 좌충우돌 루디 하디수와르노 미용실 체인은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루디 하디수와르노(Rudy Hadisuwarno)라는 이름만 달고 있는 미용실들은 그 중 최고급에 속하고 그 중에서도 ‘Executive’가 뒤에 붙어 있는 곳은 부유한 상류층들을 주고객으로 합니다. 일반 서민 대중 대상의 저가 미용실 브라운 살롱(Brown Salon)과 살롱 루디(Salon Rudy)는 일반 몰에서는 물론 자카르타 외곽이나 인근 위성도시들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루디 하디수와르노 개인의 명성과 그의 미용실 체인 위상은 아직 인도네시아에서 필적할 만한 경쟁자가 드물고 그 지분도 적지 않아 미용실 브랜드로 출시되는 헤어 관련 상품들도 적지 않고 현재 현지 미용실 산업 중견업체로 발돋움한 마이 살롱(M..
ep5. 떠나 보내기 루디 하디수와르노가 스텔라 자매에게 마련해 준 새로운 환경은 나나 메이가 당초 기대한 것을 훨씬 넘어서 있었습니다. 내가 원래 기대했던 것은 스텔라에 대한 처우였지 스테피에 대한 것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스텔라가 루디 밑에서 교육을 받고 근무하는 동안 루디의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문제들, 예컨데 집에 남은 스테피를 돌보고 등하교를 돕는 일 정도는 어떤 식으로는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었죠. 물론 스테피의 학교 숙제를 봐주거나 음식, 옷가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주는 것이 거의 여력이 없을 것임을 감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루디가 스텔라와 스테피가 당면한 문제들 대부분을 한 방에 해결해 준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에요..
ep4. 루디 하디수와르노 스테피를 학교에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는 명목상 인도네시아에서도 무상교육이었으므로 티티 아줌마가 가까운 초등학교에 수속을 마쳤고 메이를 통해 필요한 교복이나 가방, 학용품을 사주고 내가 일부 경비를 지출하는 것만으로 스테피는 꿈에도 그리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피가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저 기쁨을 지켜줘야 할 것 같다는 책임감이 조금 더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 두 자매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좀 더 노력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스텔라가 스테피와 헤어지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는 게 중요했습니다. 결국 내 거래선들에게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밖에 ..
ep3. 모래지옥 외근 길에 일이 있어 메이가 센티옹 부모집을 들른 적이 있는데 함께 갔던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까위까위(Kawi-Kawi)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습니다. 어디나 그렇듯 할렘의 동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공도 차고 달리며 몰려다니면서 자꾸 차를 건드려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짖고 까부는 아이들 사이에 확 눈이 띄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취학 전 코흘리개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깡마른 단발머리 여자애였습니다. 팔 다리가 유난히 긴 그 아이는 선명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어 앞으로 남자들 마음을 무척이나 흔들 미인으로 자라날 것이 틀림없어 보였는데 그래서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가지나 레게 머리를 하려다 만 듯한 떡지고 삐죽삐죽 뻗친 머리칼이 흰 피부와 티없는 ..
ep2. 매매 그러던 중 스텔라는 탈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창문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꼬스 가까이에 사는 티티 아줌마였어요. 티티 아줌마 자신도 그리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오랜 세월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갈비뼈를 부러뜨렸던 남편의 폭력도 그녀의 착한 심성을 망가뜨릴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티티 아줌마는 스텔라가 자기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붙잡아 앉혀놓고 굳이 밥상을 차려 주는가 하면 스텔라가 잔심부름으로 정신 없이 이리저리 뛰어 다녀 밥 얻어먹을 틈조차 없으면 튀김 몇 조각이나마 기름종이에 싸서 주머니나 가방에 쑤셔 넣어주곤 했습니다. 처음엔 그 호의의 이면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를 저의를 의심하며 조심하던 스텔라..
ep1. 엑소더스 15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한껏 무르익은 스텔라(Stella)는 거의 성숙한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성의 순결을 강요하는 무슬림 규범에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대도시 할렘 청소년들의 성의식을 따랐다면 벌써 남자친구 여러 명을 난잡하게 사귀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고 경제적 이유로 13-14세의 여아를 30-40대의 남자에게 팔아 치우듯 돈을 받고 조혼시키곤 하는 인도네시아 촌구석의 전통적 관습을 생각한다면 이미 아이를 한 둘 낳았어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스텔라가 그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했던 것은 학교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는 것이 어린 딸을 돈 많고 나이 많은 친인척, 동네 유지에게 둘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