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밑바닥 블루스 5

밑바닥 블루스 (5)

ep5. 에필로그 - 밑바닥 사람들 메이의 가방을 스넨 폴섹에서 찾아온 건 그 해가 거의 저물어가던 2011년 12월 27일의 일이었습니다. 원래는 다시 아쩨 북방 어딘가의 시추선으로 돌아간 우신이 돌아오길 기다려 함께 경찰서에 가방을 찾으러 갈 예정이었으므로 그게 2012년 1월이나 2월 쯤이 될 예정이었지만 알정을 당긴 이유는 시추선에 있던 우신이 이삔(Ipin)이란 친구를 대신 붙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든 3D 만화영화 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삔이란 이름의 예쁜 대머리 어린이를 떠올리겠지만 우신의 친구 이삔은 아직도 스넨 지역에서 활동하는 현역 쁘레만이었습니다. 폴섹에서는 가방을 내주면서 따로 돈을 더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없어진 내용물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메이..

밑바닥 블루스 2021.12.27

밑바닥 블루스 (4)

ep.4 돈이 정말 문제 메이는 스넨 폴섹에서 경관에게 취조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인데 말입니다. “이건 뭐야? 이거 사람 이름인가? 그리고 그 옆에 적힌 금액들은 무슨 뜻이야?” “그건 우리 보스가 쓴 메모에요.” “이 돈이 무슨 뜻이냐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난 그걸 XX회사에 전달하면 끝인데.” “이거 받을 돈인 모양인데. 너희 사장 전화번호 몇 번이야? 내가 직접 물어보지.” 메이와 경관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내가 메이에게 적어 준 수금계획내역을 놓고서입니다. 적잖은 금액이 적혀 있으니 경찰입장에서는 궁금하기도 하고 군침이 돌기도 하겠지만 그게 메이가 스넨 환승역에서 겪은 소매치기 사건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메이는 겁을 먹고서도 최선을 다해 말을 둘러대며 방어했지..

밑바닥 블루스 2021.12.26

밑바닥 블루스 (3)

ep3. 경찰들이 더 문제 메이가 소매치기랑 경찰서에 가게 된 것은 메이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상황에 떠밀린 것이죠. 수퍼맨 아저씨의 선빵으로 시작된 사람들의 린치로 소매치기는 반 죽음될 정도로 뭇매를 맞았고 이윽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에게 수퍼맨 아저씨가 증인을 자처하면서 메이가 피해자라며 등을 떠밀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우리 지구대 정도인 폴섹(POLSEK)에 가게 됩니다. 스넨에서 쯤빠까마스(Cempaka Mas)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있는 바로 그 작은 경찰서 말입니다. 하지만 난 직원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경찰과 엮이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도 타의 모범이 되고 만인이 존경해 마지 않는 청렴결백한 경찰관이 어딘가 분명 있겠지만 내가 겪은 경찰들 중엔 돈을 뜯지 않는 이..

밑바닥 블루스 2021.12.25

밑바닥 블루스 (2)

ep2. 버스웨이도 문제 다음날인 토요일, 난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뜬금없이 청소용 플라스틱 버켓(바께스)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켓에 새까만 때가 꼬질꼬질하게 끼어 있는 것을 못 본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사무실 청소가 직원들 책임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쁘고 튼튼한 청소도구들을 내가 쓰려고 사놓고 틈틈이 직접 청소도 하고 청소도구도 꼼꼼히 닦아 놓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전편에 언급했던 랜달, 헤르디 같은 친구들도 가끔 청소를 했는데 쓰레기가 더러운 것이지 쓰레기 치우는 청소도구들은 쓰레기통까지 포함하여 모두 반짝반짝 윤이 나야 한다는 내 생각에 그들은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청소도구가 쓰레기만큼 더러운 상태인 게 당연하다고 여겼죠. 물론 이건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의 사고방식 ..

밑바닥 블루스 2021.12.24

밑바닥 블루스 (1)

ep1. 남자들이 문제 2011년의 일입니다. 아직도 미용기기 수입판매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죠. 한해가 순식간에 내달려 어느새 12월이 되자 월초부터 송년회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자카르타 시내에서 열리는 한 동문 송년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 시간을 대려고 사무실에서 포장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나는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뭐, 솔직히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주인공이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내 인생인데 말이죠. 한국에서 날아온 제품에 플라스틱을 입히고 다시 스티커를 붙이는 일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원래 400개쯤 작업하는 데 직원 3-4명이 달라 붙어도 오전 내내 일해야 하는 적잖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그걸 내가 땀 뻘뻘 흘리며 혼자 달라 붙어 끙끙대며 일하는 건 순전히..

밑바닥 블루스 202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