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아 근대사 70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8) 완결

제8장 : 그날 이후 족자 술탄국– 끄라톤 술탄 살인사건 하멩꾸부워노 5세는 장성한 후에도 여전히 소심한 성격으로, 주어진 것은 누리되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 버릇이 몸에 베여 있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눈에 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정치적 행위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정치와는 거리가 먼 문화예술 방면에 관심을 쏟아 스스로 몇몇 궁중무용을 고안하기도 했고 그의 재위기간 중 와양 그림자극 변사들 숫자도 5배나 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멩꾸부워노 5세의 무기력한 처신에 만족해한 것은 아닙니다. 술탄의 형제인 구스티 라덴 마스 무스토요(Gusti Raden Mas Mustojo)는 그런 모습을 노골적으로 혐오했습니다. 그는 하멩꾸부워노 ..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 (7)

제7장: 센똣 쁘라위라디르죠의 생애 센똣 쁘라위로디르죠는 네덜란드에게 항복한 후 매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 회유에 앞장섰고 자바 전쟁이 끝나자 서부 수마트라에 파견되어 네덜란드 편에서 이슬람 파드리 분파(Paderi)의 반란 진압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네덜란드에게 놀아난 끝에 1855년 4월 17일 유배지에서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한때 모셨던 디포네고로 왕자가 마카사르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지 3개월 후의 일이었죠. 센똣은 한때 세상을 전율케 한 영웅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지 못했습니다. (계속)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 (6)

제6장 : 끼아이 모조의 생애 끼아이 모조의 본명은 무슬림 무하마드(Muslim Mochammad)로179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족자 끄라톤의 왕족이었지만 그는 왕궁 밖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군에 합류해 활약하다가1828년 11월 17일 끔방아룬에서 체포되어 바타비아에 끌려갔다가 북부 술라웨시 미나하사의 똔다노에 유폐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바인 마을을 세웠는데 그곳은 미나하사 전역으로 이슬람이 전파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똔다노에서 추종자들에게 호신술로서 까누가란(Kanugaran) 이라는 체술(體術)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일찍이 디포네고로 왕자가 배워 익힌 것이기도 했습니다. 끼아아 모조는 네덜란드군에게 생포된 후 죽는 날까지 디포네고로 왕자와 끝내 재회하지 못했고 유배지에..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5)

제5장 : 디포네고로의 아내들 디포네고로 왕자가 스스로 후궁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열등감으로 왕위를 사양하기도 했지만 그가 평생 8명의 여인과 결혼한 것은 족자 술탄 왕가에서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문헌에서는 그의 아내를 9명까지 헤아리기도 합니다, 그는 1803년 10월 하멩꾸부워노 1세의 정실이었던 증조할머니를 여읜 후 더욱 이슬람에 심취하며 뜨갈레죠 일대에 사는 울라마들과 유대관계를 강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족자 북쪽 슬레만(Sleman) 지역 이슬람 선생의 딸과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신부의 이름은 라덴 아유 렛노 마두브롱토(Raden Ayu Retno Madubrongto)였습니다. 그녀는 디포네고로 왕자의 첫 번째 부인입니다. 그녀는 잘 생긴 아들을 낳아 라덴 마스 온..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 (4)

제4장 : 왕가의 호칭 인도네시아 전역에 산재하는 왕가에는 왕과 왕족들을 부를 때 이름의 앞뒤로 붙는 공식적인 칭호들이 각각 존재합니다. 일부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하며 때로는 서로 영향을 주어 주고받은 듯한 호칭들도 존재합니다. 본문에서도 라덴 마스…., 깐젱 아유…., 라는 식의 호칭들이 줄곧 등장하는데 일단 족자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의 왕실 호칭 체계를 간단히 짚어 보기로 합니다. 족자 술탄국 술탄: 응아르소 달럼 삼뻐야 달럼 잉깡 시누운 스리 술탄 하멩꾸부워노 잉깡 쥬머넝 까~~ 수리야닝 마타람 스노빠티-잉-응알라가 랑겡 잉 바워노, 랑겡, 랑겡 잉 따타 빠나따가마(Ngarso Dalem Sampeyan Dalem Ingkang Sinuwun Sri Sultan Hamengkubaw..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 (3)

제3장 : 족자 끄라톤 수비대 현대의 족자 끄라톤엔 10개의 부대가 편성되어 있지만 총 병력은 600명 전후의 적은 숫자이고 그중 뉴트로 부대(Bragada Nyutra)는 64명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주로 왕실의 행사 위주로 동원되지만 과거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 시대엔 실제 전투병들로 편성된 9,000명 규모의 경비대가 끄라톤 안팎에서 왕실을 보위했습니다. 왕실 행사에 등장하는 이들 각 부대의 사진들을 첨부합니다. (아래 사진들의 출처는 족자 끄라톤궁 홈페이지) (계속)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 (2)

제2장 : 토마스 스탬포드 빙글리 래플스 영국 총독대행 토마스 스템포드 빙글리 래플스 경(1781. 7. 6~ 1826. 7. 5)은 영국령 자바의 총독대행(1817–1822), 벤쿨렌(지금의 벙꿀루) 주지사(1817~1822)를 역임했고 그 후 싱가폴과 영국령 말레이시아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말레이어에 능했고 자바에 주재하던 기간동안 보로부드르와 쁘람바난 등 고대 유적들의 발굴을 시작하는가 하면 오늘날 보고르 식물원 (Kebon Raya)의 전신인 국립식물원의 조경공사를 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싱가포르 총독으로서 오늘날 싱가포르가 있도록 한 초석을 닦아 싱가포르의 도로, 건물, 학교 등이 그의 이름을 따르고 있으니 어딘가 온건한 행정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 (1)

제1장 : 니로로키둘과 마타람 왕국 니로로키둘(Nyi Roro Kidul)은 자바섬에서 전해내려오는 남쪽바다 마물들의 여왕입니다. 깐젱라투키둘(Kanjeng Ratu Kidul)이라고도 합니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들은 물론 일반인들 중에서도 그녀가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유구한 전통문화 속에 전설적인 강력한 영적 존재로 아로새겨져 있고 족자 가까운 남쪽 해안지대 빠랑 뜨리띠스(Parangtritis)지역이 자바의 영적 왕국 중심부라고 하죠. 차갑도록 아름답고 통찰력과 직관을 겸비한 니로로키둘은 무서운 자존심과 질투심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옷 색깔과 같은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바다 속으로 끌어들여 익사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거느린 마물들의 군대와 그 사령관 격..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6) - 완결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6) 제8장 그가 남긴 것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Manado)는, 말하자면 동인도의 북쪽 끝이었지만 아주 오지는 아니었습니다. 마나도는 한국 참치잡이 원양어선이 자주 기항하면서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항구인데 대항해시대 당시에도 포르투갈 상선들을 위시해 그후 유럽 선박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이었죠. 디포네고로 왕자와 그들 일행을 마나도로 보낸 것은 그곳 미나하사(Minahasa) 지역을 네덜란드가 공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디포네고로 왕자를 구출하러 올지도 모를 민중군을 두려워했으므로 마나도쯤이라면 설사 그런 구출시도가 있다 해도 충분히 격퇴할 만한 환경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네덜란드에게 여전히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고 동인도 민중..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5)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5) 물론 디포네고로의 체포에 대해 네덜란드 측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네덜란드의 미술가 니콜라스 피에너만(Nicolaas Pieneman)은 똑같은 장면을 자진해 항복하러 온 디포네고로가 네덜란드에 굴종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물론 디포네고로가 항복했다는 말은 네덜란드군이 날조해 퍼뜨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네덜란드군이 스텔셀 요새작전으로 디포네고로군을 옥죄어 올 때 그는 휘하 부대에게 보다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적에게 쉽사리 항복하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 배신당해 체포당하게 되었을 때 항복하기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굳건히 견지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날 방도가 없다면 나는 처형당하는 편을 선택하겠다. 내게 항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