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소설 17

은이 이야기

​ 은이를 처음 만난건 중3때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오빠와 살던 은이는 얼굴이 희고 눈매가 똘망똘망한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어느 날 어느 TV 연속극에서 김혜자가 화상을 입는 장면이 나왔는데 다음날 내내 그 앤 눈물을 글썽였다. 김혜자를 보면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난다는 거였다. ​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늘 얼굴을 마주쳤지만 난 말도 잘 걸지 못했다. 대학생들과 주로 어울리던 은이는 아마 나보다 훨씬 조숙했던 것 같다. 산행을 가던 날 그애가 눈덥힌 북한산의 좁은 산길을 어느 대학생 손을 잡고 그 일행들과 어울려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하게 아파오곤 했다. ​ 버스를 두번 씩이나 갈아타면서 북가좌동 집과 방배동 학교사이를 오가면서 일주일에도 몇..

소설 2023.08.21

후배 등치는 게 당연한 세상

존경스럽지 않은 선배들 인도네시아에 학군 동문회 지회가 발족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그저 사업상 업무상 현지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당시 학군 동문회에 참석해서야 자신들이 동문이란 걸 그제서야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를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다. 내가 그 동문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99년. 발족한지 4년 지난 후였다. 난 1995년에 인도네시아에 발령되어 부임했지만 학군 모임이 있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 당시엔 그런 공지를 교민전체를 대상으로 낼 방법이 없어 알음알음으로 한정된 주변지인들 정도에만 알릴 수 있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커지던 교민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개인적 또는 사업적으로 한국인들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생기고 회사에서 괴롭힘이나 반목도 벌어지고 심지어 주..

소설 2022.07.05

랩톱에 깃든 작은 이야기

랩톱에 깃든 작은 이야기 주렁주렁 달린 코드들과 액세서리들을 하나씩 뽑아 분리한 삼성 랩톱을 보조 책상에 옮기고 새 레노보 랩톱을 메인스테이션에 올려 놓았다. 그런 다음 아까 뽑았던 코드들을 다시 연결하니 보조 모니터가 켜지고 마우스 커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새 랩톱에 세팅해야 할 것들이 아직 산더미지만 어쨌든 그렇게 새 시대가 또 시작되었다. 랩톱 하나 바꿨다고 뭐 새 시대까지 들먹일까 싶지만 나름 사양 높은, 그러나 6년쯤 사용하면서 여기저기 물리적 파손도 생기고 소프트웨어 에러도 잦아진 삼성 랩톱을 중국산 레노보, 그것도 속도나 램, 메모리 크기가 오히려 더 작고 느린 저사양 모델로 교체하는 건 나름 상당한 마음의 결심을 요한다. 특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50대..

소설 2022.06.20

그의 원한

그의 원한 2년간 다녔던 회사를 나온지 10일차. 경제적으론 분명 곧 쪼들리기 시작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그 비상식적인 아수라장을 떠났다는 사실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사업구조 속에서 악의 충만한 두 사람이 서로 비수를 등에 숨기고 이용하려고 들던 곳에서 공연히 당사자도 아닌 내가 그 둘에게 놀아나 남에게 피해줄 바에 반드시 그 전에 정리하고 떠나겠다고 맘먹었던 터였다. 사실 사람들은 다 그런 판단하면서 산다. 사람이란 변해가는 존재라지만 큰 애 멜번으로 대학보낼 때 잔액증명 떼기 위해 도움주었던 10년 터울의 선배는 그 사이 취득한 인도네시아 국적과 알량한 현지 인맥을 휘드르며 남의 피해를 불사하고 노욕을 불사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제였던가? ..

소설 2020.06.05

[소설] 넷째 날

넷째 날(화염검-1) 1. 디폰 눈앞에 펼쳐지는 칠흑 같은 우주와 바로 어깨 곁을 스치듯 지나 멀어지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디폰은 카나엘이 전해 준 제누파의 메시지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도착하는 순간이 우리 약속시간인 거야. 서둘러도 좋고 게으름 피워도 좋아. 하지만 약속장소에서부터는 내 시간표를 따라줘야 해. 그 전까지는 모든 것이 네 자유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부탁한 것을 틀림없이 준비하는 것만은 절대 잊지 말아 줘.” 뭔가 심상찮은 일을 벌이려는 제누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라고 디폰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도착한 후에야 그의 계획을 시작하겠다는 제누파의 너그러움은 오히려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급히 서둘러 달라는 독촉처럼 들렸다. ‘항상 제멋대로면서….’ 디폰은 고개..

소설 2020.01.02

한번 ROTC는 영원한 ROTC

한번 ROTC는 영원한 ROTC 교통사고가 난 것은 비자금장부를 인계받은지 2주쯤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위험한 사고가 일어날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운전사는 그날 출근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는데 짜꿍으로 들어가는 톨에서 바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뒷바퀴가요. 고속으로 달리던 중 앞바퀴가 터졌다면 내가 몰던 그랜드끼장은 뒤집히거나 길섶 어딘가로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뒷바퀴 타이어는 거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스페어타이어를 갈았지만 더 이상 운행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난 출근을 포기했어요. 다음날 아침 출근했을 때 내 책상 서랍 열쇠가 고장난 채 열려 있었고 그 안에 두었던 비자금장부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어제 출근길에 죽거나 크게 다쳤다면 아무 죄없는 내 책..

소설 2018.09.20

세월호 엄마들 자카르타 간담회 뒷 얘기

한인회엔 한국인이 없다. "그 사람들 남한사람 맞아?" "네?" "북한사람 아니고 한국사람 맞냔 말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인도네시아까지 와서 교민사회 들쑤시고 현지 정부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게 어디 애국심 있는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이요?" 이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국정원 요원이나 대사관 경찰영사가 아닙니다. 전화를 하고 있는 상대표는 이제 인도네시아 동포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식인이자 사업가이지만 첫 직장이었던 K그룹 창업자가 별세하고 기업의 주인이 바뀌던 과정에서 정의롭다고 여겼던 편에 섰다가 혹독하게 고생했던 것을 시작으로 평생을 교민사회의 비주류에서 있었던 분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우측으로 돌아가 있는 극우인사들과는 결을 달리 하는 분이..

소설 2017.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