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군대에서 배운 일본어

beautician 2021. 4. 22. 11:53

동반성장

 

 

임진각에서 이 자유의 다리를 건너가면 멸공관이 나온다  

 

내가 근무했던 멸공관의 정식명칭은 ‘안보통제부’라는 곳이었는데 이름만 봐서는 무슨 정보부서 같은 이 부대가 하는 일은 임진각에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 GOP 지역으로 들어오는 안보관광객들을 안내해 멸공관에서는 안보전시관과 10분짜리 반공영화를 보여준 후 도라전망대와 제3땅굴을 견학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JSA에서 연락장교가 나와 우리 관광팀을 인수해 판문점을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고 순서가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왔는데 특히 국군의 날 전후엔 수행 보좌관들을 거느린 각국 장군들과 국방장관들로 브리핑룸이 가득 찼고 평소에도 훈련함을 타고 온 각국 해군사관생도들, 각국 장차관들도 적잖게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전두환의 5공에서 노태우의 6공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으니 남북한 대치상황을 더욱 국내외에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의전과 브리핑을 담당하는 안내장교들은 언어 전공자로 채워졌는데 난 영어 담당이었고 다른 장교들 중엔 불어, 중국어 담당도 있었습니다.

 

당시엔 관광버스 단위로 들어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매일 몇 팀씩 들어와 서울대 중문학과 출신인데 독학으로 배운 일본어가 유창한 선배 이중위 혼자서는 물리적으로 감당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소위 달고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선배는 실장님의 재가를 받아 매일 아침 한 시간가량 실장님을 비롯한 장교들 전원을 대상으로 일본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난 당시 장교들 중엔 가장 졸병이어서 제일 먼저 들어오는 팀을 안내해야 했으므로 그 일본어 강의의 뒷부분을 자주 빼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3~4개월쯤 기초문법을 배운 후 등 떠밀려 일본팀을 맡아야 했습니다. 처음엔 애를 먹었지만 이후 일본어는 점점 입에 붙었고 나중엔 아주 유창하진 않아도 구사가능한 언어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건 다른 장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후 누구나 다 일본팀들을 안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난 전역 후 한화그룹에 돌아가 일본어 특기를 인정받아 나중에 인도네시아에 발령될 때까지 7년간 레인웨어 일본수출을 담당했습니다. 한 번 가면 토쿄에서 시작해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 기후, 오사카, 와카야마와 오카야마, 고마츠를 찍고 돌아와야 하는 2주 짜리 일본 출장도 혼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온 후에도 내 베스트 프렌드는 쿠기미야라는 같은 또래의 거래선 법인장이었고 그 친구가 두 번째 결혼을 처절한 이혼으로 끝냈을 때 지인들과의 조촐한 ‘이혼파티’에도 초대받았고 세 번째 결혼엔 그의 일본인 친구들을 거느리고 함(비슷한 것)을 들고 신부집에 앞장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멸공관 보좌관님이셨습니다.

 

그때 함께 일본어를 공부했던 사람 중 멸공관 2인자 천대위는 삼사 출신이란 점을 차별받아 결국 소령 진급을 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지만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지금은 제법 이름을 알린 시니어 모델이 되었고 드라마에도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는데 그를 중심으로 옛날 멸공관 장교들 대부분이 카톡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본어 얘기가 나왔죠.

 

“선배님한테 배운 일본어가 내 평생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어, 그래?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냐? 내가 일본어를 가르쳤었어?”

 

상해에서 사업을 하는 이중위는 자신이 우리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나도 이중위한테 일본어 배운 거 프로필에 올리곤 했어.” 천대위도 그렇게 거들었지만 선배 이중위는 정말 기억 못하는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의 평생 자산이 될 만한 계기를 만들어 준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정말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선배 이중위처럼 있었는데 새까맣게 있긴 잊어버리고 만 걸까요?

 

 

2021.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