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월말이 다가오면 마감에 쫓기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월말은 평소보다 좀 더 여러 개의 마감이 걸렸습니다. 4월 1일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팀에 제출해야 할 , 데일리인도네시아의 여덟 번째 연재 원고 마감이고 4월 5일은 영진위 국제교류팀에 를 써야 합니다. 영진위나 출판진흥원 보고서를 쓰려면 평소에 검색해 모아 놓은 광범위한 관련 기사와 자료들을 마감 열흘 전쯤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사흘 전쯤부터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야 마감일에 나름 형태와 함량을 갖춘 원고가 완성되죠. 매월 20일에 마감하는 출판진흥원의 월간 모니터링 보고서도 그런 식이니 사실 보고서 걱정을 잠깐 잊는 기간은 마감 직후 5일씩, 한달에 열흘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비정기적인 원고들을 마감해야 하는데 주간 단위로 계약하는 인도..
내가 겪어 본 경쟁의 시작과 끝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경쟁상황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두 개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중 하나는 대기업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입대 전 취직했던 회사에 돌아가 보니 6개월 전에 입사해 일하고 있던 일단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입사로는 내가 빠르지만 일은 그 친구들이 먼저 시작했으니 서열을 매기기 애매했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비슷해 결국 모두 친구 먹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좀 껄끄러운 한 명이 있었어요. 그는 다른 동기들보다 두 살쯤 많은 그는 6개월 방위를 마쳤으니 사실은 자기 또래보다 입사가 4년쯤 늦었는데 내가 나온 대학의 중국어과를 나와 동문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그 친구가 나랑 같은 의류팀에 배정되어 난 일본수출담당, ..
독한 인간이 되려면 2019년 초에 뿌지(Puji)라는 친구로부터 와쎕(whatsapp)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300만 루피아, 한화로 약 25만원쯤 되는 돈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뿌지는 2004년쯤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인데 골프 액세서리를 한국에서 수입해 파는 사람과 오래 일한 친구입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두 곳에서 사업하던 한국인 사장이 결국 태국에 집중하게 되자 뿌지도 결국 정리되었는데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분을 삼키며 자카르타에서 차로 네 시간쯤 걸리는 고향 찔레곤(Cilegon)으로 돌아간 그녀는 결혼해서 애기도 낳았고 작은 가게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0만 루피아를 빌려 달라 한 것은 그 가게가 잘 되지 않아 은행에서 빌..
몰랐던 재능 그 LH 직원들은 직장을 다니면서 투기에 능한 자신들의 재능을 발견했고, 그 재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전파까지 했으니 뛰어난 마케팅 능력까지 발견한 것이라 보입니다. 물론 그 마케팅 활동의 속마음은 함께 돈 벌자는 것보다는 공범자로 만들어 입을 막겠다는 의도도 분명 있었겠죠. 짧은 대기업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대학전공과는 무관하게 조직 안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는 요즘 와서 뒷북 치며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보는 사람 손발이 다 오그라질 정도로 상사들에게 아첨을 떨며 타잔처럼 줄타기의 재능을 보였고 또 어떤 이들은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무색하게 모든 잘못을 부하들에게 돌리며 홀로 살아남는 생존력을 자랑했습니다. 자기가 정확한 상황을 알았다면 절대 서명하지 않았을..
스트레스의 근원 오늘의 주제는 ‘하는 일의 의미와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방법’인 것 같은데 이미 여러 번 직간접적으로 다루어 본 주제인 것 같아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해 보려 합니다. 아직 남은 주제들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앞으로 풀어 놓을 이야기들을 대략 미리 배분해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 큰 상관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만은 최근 며칠 쓴 글들 평균치의 반쯤 분량에서 끊겠다고도 다짐해 봅니다. 일하는 것만큼 땡땡이가 쾌감 쩌는 것처럼 쓰는 것 못지않게 끊는 것도 중요한 데 말입니다. 스트레스를 다스리려면 그 원인을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일을 두고 말하자면 일이 많아서, 또는 일이 없거나 적어서, 또는 복잡해서, 일이 정기적이지 못해서, 너무 겹쳐 들어와 과중해서, 내가 다룰 ..
내가 일을 하는 이유 일을 하면서 기뻤던 일들보다는 속 썩었던 일들이 더 많지만 첫 미용가위 대량 오더를 받았을 때가 기억납니다. 2006년쯤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2년 파산하던 당시. 파산이라 해서 바로 무슨 도끼 같은 게 날아와 순식간에 머리통을 찍어 고꾸러뜨리는 게 아닙니다. 파산이란 일정한 기간 동안 감당할 수 없는 만기일이 연이어 찾아오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재해야 하는 시점에서 돈을 내지 못하면서 팔 다리가 하나씩 잘리게 되죠. 사지가 다 잘릴 날은 이미 달력에 새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채 정해져 있었습니다. 난 반드시 죽게 될 테지만 그 전까지, 날 부활시킬 무언가를 미친듯이 찾아 헤맸고 될 성싶은 것들은 없는 돈을 짜내서 간단한 시장테스트를 돌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시도..
다시 오지 않을 일 1996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쯔비시 상사 인도네시아 지점과 자카르타의 한화공장을 인수한 벨기에 ‘시온’이란 섬유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난 한화그룹에서 의류팀 전원과 함께 퇴사해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관리를 담당하고 나머지 친구들이 한국에서 오더관리과 자재수급을 담당하는 것으로 동업을 약속하고 막 인도네시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동업을 약속한 입에 침도 마르기 전이 아니었다면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관문이 되어 줄 지도 모를 그 기회를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과 2년 후 친구들이 외환위기의 와중에 내게 등을 돌렸을 때 1996년 의리를 지킨다며 스카우트를 거절했던 난 결과적으로 바보천치가 되어버리고 말았..
지나온 시간들이 의미 있기 위해 2019년 라마단 금식월이 끝나고 이슬람력 ‘샤왈’ 월에 들어서면서 이둘피트리 축제와 함께 시작되는 연휴 첫 날, 난 술라웨시 떵가라의 주도 끈다리(Kendari)를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유치장에 들어간 릴리를 도우러 인디아계 영국인 국제변호사와 함께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고작 변호사 통역 정도였지만 그나마 릴리는 꼭 내가 와 주길 바랐습니다 내가 일을 봐주고 있던 회사는 그 여행의 걸림돌이었습니다. 연휴기간 동안의 일정이니 문제가 없어야 했지만 회사의 대표는 점점 더 직원들에게 야박하게 굴고 있었습니다. 대개의 사무실들은 일주일, 공장들은 2~3주를 휴무하며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 보통인 이둘피트리는 사업주 측에서는 짜증나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