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우리와는 달라야 할 다음 세대 학교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과 전혀 동떨어진 겸양과 자기 희생으로 점철된 비루한 삶을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해 가르치는 것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건 예전 일제 강점기의 ‘국민학교’가 대중을 국가이념으로 세뇌해 국가가 사용하고 통제하기 편리한, 그래서 때로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 카미카제형 ‘국민’으로 찍어내려 했던 방식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이렇게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우리 개개인이 태어난 이유까지도 국가가 자기 맘대로 통일해 규정하려 했습니다. 현대의 교육은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의견을 구축하고 설득하고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 못지않게 비판하고 저항하고 싸우고 견디고 부러뜨리고 치료하면서 독해지는 법..
일상다반사 스텔라와 스테피라는 자매를 10년 전쯤에 알았다. 수마트라 북부 메단(Medan) 출신 부모를 둔 바딱(Batak)족 아이들인데 부모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엄마 쪽 친척이 운영하는 꼬스(Kost)에 살고 있었다. 꼬스는 자취방 비슷한 곳이다. 아버지가 먼저 죽고 엄마도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쪽 친척이 양육권을 받아 메단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이들은 그 집을 도망쳐 나와 자카르타까지 그 먼 길을 돌아왔다. 메단에서 학대가 심했던 거라도 짐작할 뿐이다. 돈도 없이 천 킬로미터도 훨씬 넘는 거리를, 그것도 수마트라와 자바 사이의 해협까지 건너온 아이들은 완전히 거지 꼴이 되어 엄마 쪽 친척 꼬스 앞에 도착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아 아이들은 문 밖 길가에서 그날 ..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것 신입이든 경력이든 회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이른바 ‘프로베이션’이란 이름으로 1~3개월 정도의 잠정평가기간을 갖습니다. 딱히 뭔가 벌어진 문제나 상황을 수습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기를 ‘수습기간’이라 부르는 건 아마 쓰는 한자가 다르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수습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 기간은 서로가 어떤 사람, 어떤 기업인지 스팩과 실제를 비교, 평가하는 기간인 셈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도 특별히 공식적으로 그런 원칙을 세워놓진 않아도 비슷한 기제가 작동합니다. 일정 기간 서로 간을 보는 거죠. 그런 다음 등급을 매깁니다. 이 사람은 50미터짜리, 저 사람은 5미터짜리……,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적정 안전거리를 정하는 겁니다. 대개는 그다지 영향을..
반려동물과 산다는 것 태국어과 출신 학군 동기 한 명이 집에서 개를 한 마리 키웠습니다. 그게 임관 전이니 1985년쯤인데 그 집안 전부 그 작은 시추 한 마리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습니다. 얼마 전 그 친구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니 개가 한 마리 웃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개가 됐을 리 없으니 지금 키우는 개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개가 그리 오래 살 지 못하니 당연히 옛날 그 시추가 아닌 다른 개체일 겁니다. “매일 골골 해서 약으로 연명하는 애야.” 안부를 물으니 그 친구 대답이 이랬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일찌감치 반려견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어리고 예쁠 때뿐 아니라 늙고 병든 후에도 끝까지 책임지는 게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개 키울 자격이 있는 거죠. 차차와 마르..
나 자신과의 소통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선하게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선하다, 착하다는 말이 나쁜 말일 리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착한 사람이 되라고 배워왔고 사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일에 약간의 진심과 선의를 담고, 필요하다면 자기희생을 조금 더해 주면 누구나 듣게 될 찬사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말이 너무나 듣기 싫어졌습니다. 최근 10~20년 사이에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위해 나에게 장기적인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건 대개 채용이나 계약의 형태였고요. 그들이 내가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마운 감정이 들고 선하다 착하다는 찬사를 입에 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딱 보면 다 아는 사람들 우린 처음 만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첫 눈에 그의 배경과 이력을 꿰뚫어보고 그 진면목을 직시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물론 자긴 상대방과 몇 마디만 나눠보면 모든 게 판단된다며 잘난 척하는 무당 같은 인간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 모습이 왜곡되는 이유는 그를 바라보는 내 시각, 내 입장, 내 색안경 때문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나이 많은지 더 어린지, 더 좋은 학교를 나왔는지, 돈이 더 많은지, 더 좋은 직장을 다니는지, 인맥이 더 좋은지…… 그런 비교를 하면서 상대방을 판단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리나는 나랑 처음 만났을 때 한 일본 섬유원단 업체의 마케팅 매니저였습니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거의 ..
불편한 장소 대학졸업 직전 대기업 전형을 통과하고 연수까지 마친 후 을지로 2가 본사 건물에 배치된 것이 1986년 초였다. 당시 군대가기 전까지 했던 일은 플라자호텔에 납품되었지만 선도가 살짝 나빠져 훈제되어 다시 포장된 연어를 팔러 다니는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뭔가 과업을 받아 사무실을 나서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신입사원들에게 앉으라고 한 자리 때문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해당 층에 내리면 왼쪽과 오른쪽에 큰 문이 하나씩 있는데 그걸 열고 들어가면 통으로 뻥 뚫린 사무실이 펼쳐졌다. 신입사원들 자리는 그 문 바로 앞의 책상들. 우린 문이 열릴 때마다 일어나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그게 절대 좋은 아침일 리 없었다. 그 자리에 앉힌..
사유를 위한 공간 그런 뜻이 아닐 텐데 갑자기 사유지가 떠오르며 지금 나와 있는 출장상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릴리네 광산 IPPKH지역에서 한 명이 죽고 네 명이 다친 4월 9일의 차량전복사고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욕망이 서로 부딪히는 모습을 투영해 주었다. 사고가 난 지역은 릴리의 회사가 탐사허가를 받은 곳, 즉 시추공을 뚫거나 각종 지질조사를 통해 광물 매장량을 확인하고 이후 채굴 경제성을 따져 보려고 지도상 좌표를 찍고 경계선을 그어 놓은 곳이다. 거기에 유니폼을 입은 다른 회사직원들이 허가 없이 들어가 자기들이 몰래 채굴할 곳을 답사하다가 아마도 또 다른 불법채굴업자 오래 전에 파놓은 구덩이에 차량이 곤두박질치면서 벌어진 사고였다. 사고가 저녁무렵 벌어져 구조작업은 다음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