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마음 에너지 충전소

고갈된 마음 에너지를 위한 초강력 배터리 내가 힘든 마음을 잘 돌보는 사람인가 스스로 평가해 보려고 하니 우선 마음이 힘들었을 때를 먼저 기억해 내야만 했습니다. 최근 2년쯤을 돌이켜보니 1~2년 치 월세를 목돈으로 내야 하는 임대료, 애들 학비, 차량 할부금 같은 비용들, 먹고 살 생계비, 그걸 충당하기 위해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느냐 소위 생계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짜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날 힘들게 한 게 고작 돈 문제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 애들 학비란,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우리 아이들 말고 자카르타에서 내가 학비를 내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기간을 좀 더 늘려 보았습니다. 10년간 손잡았던 한국 공급선과 2013년 깨지고 이듬해 친구의 니켈사업까지 망가지면서 대안을 찾아 베트남에 가던..

난 글을 쓸 테니 넌 사과나무를 심거라

납치범에 대한 단상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어떤 이들은 사과나무를 심으러 갈지 몰라도 골방에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정이 바보 같아 보일지 모릅니다. 사실 세상이 멸망할 때엔 버둥거리며 뭘 하려 하든 똑같은 바보짓입니다. 1997년 불어오기 시작하던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를 때린 것은 이듬 해인 1998년이었고, 그것은 시위가 벌어지던 뜨리삭티 대학교에서 군경이 쏜 총에 학생 사망자가 나오면서 한 편으로는 수하르토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민주화운동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카르타를 마치 전쟁터처럼 만들어 버린 도시 빈민들의 폭동으로 번졌습니다. 자카르타에 살던 교민들로서는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난 한국의 동업자들이 받은 봉제오더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

정신승리는 치명적 자살행위일까? 유일한 생존의 방편일까?

이건 거의 일제와 군사독재의 논리 뭔가 일을 일답게 시작하려면 우선 하려는 일의 제목을 정하고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뭔지도 모르는 걸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이번 챕터 관련 세바시 강사로 나온 가톨릭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긍정학교 교장인 채정호 박사의 이야기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건 그 단어의 정의에 너무 힘이 들어가 상식적인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전반적인 강의내용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듯했습니다. 그는 베트남전 포로로 8년을 버티고 마침내 살아 돌아온 스톡데일 미군 중령이 '긍정적인 사람은 다 죽었다'고 증언한 것을 조명합니다. 곧 풀려 날 수 있을 것이란 제멋대로의 기대를 품었던 미군 ..

나쁜 친구를 대하는 법

내 친구 메니에르 2008년 전후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씩 하던 미용실 방문판매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매에 비해 특별히 매출이 느는 것도 아닌데 방판조직을 꾸리고 영업비를 지불하고 오토바이를 추가로 사는 등 비용만 자꾸 늘어갔습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직원들이 직접 우리 미용가위를 들고 자카르타와 반둥 시내의 미용실 수백 군데를 돌아다니니 지면광고를 내는 것보다 홍보효과가 획기적으로 높다는 것이었죠. 문제는 현금수금을 하는 상황이라 매일 정산하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쉽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밤늦더라도 직원들이 모두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수금한 돈을 보고서, 들고 나갔던 남은 물건들과 제출받고 퇴근하는 시스템이었죠. 영세기업 돌아가는 게 그랬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사고는 수없이 ..

정의감을 내려놓을 때

빨리 괴물이 되고 싶다. 가장 힘든 시련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후폭풍을 맞는 것, 특히 그 후폭풍을 내가 아닌 내 가족들이 맍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치기어린 정의감에 빠져 살던 시절엔 누가 날 좀 욕하고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 정도는 당연히 견뎌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70~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누구나 평균치의 악의와 폭력에 노출되어 살았고 어느 정도 면역력도 가지고 있었으니 내가 조직논리와 집단적 이기심, 대기업의 특성이 최대치의 탐욕 같은 것에 동조하지 않고 맞서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동조하는 정도가 적극적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태클을 당하고 떄로는 보복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일상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일말의 ..

집단 따돌림과 미얀마 시위대

두려움은 반드시 극복되는 것 최근 십 수 년을 막 살다 보니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인간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 리 없으니 겁 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어딘가 고장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도 어딘가 고장난 겁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분명 있습니다. 그걸 직시하고 싶지 않을 뿐이죠.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트라우마라고 하는 건 트라우마가 아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일부러 눈을 돌리지 않는 곳, 하지만 마주치는 순간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 그게 트라우마라고요. 진정한 두려움도 그런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두렵기에 잊어버려야만 했던 것. 어쩌면 내가 자주 꾸는 꿈 속에 두려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복잡한 스토리의 꿈 속에서 내가..

순리대로 살아질까요?

세상의 순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문제였습니다. 개중엔 노골적으로 무례하고 오만한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는 데도 그 자리나 일의 매뉴얼이 상대방을 화나게도 황당하게도 만들곤 해요. 인도네시아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면 안되는 일이 그리도 많습니다. 은행에서는 오후 2시 이후에 문을 닫은 것도 아닌데 달러화 입금도 출금도 해주지 않습니다. 룰이 그렇데요. Giro라고 부르는 어음을 현금화하려고 가면 어떤 은행은 9시반 이전에 와야만 한답니다. 자기들은 8시반에 문을 열면서요. 차량 부품이나 기계 부품이 고장 나면 어디든 가서 수리받는 게 보통이지만 여기선 거의 대부분 새 걸로 바꿔 끼우라 합니다. 새 걸 사서 끼우는 건 본질적으로 수리라고 할 수 없죠. ..

꼰대의 완성은 중독의 결과

라~때는 말이지 중독이란 어떤 일을 한 번 시작하거나 빠져들고 나면 그 해악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중단할 수 없거나 멈추거나 헤어나오기 힘든 상태, 또는 그렇게 만든 상대를 지칭하는 말이죠. 그리고 그 어감 자체가 그 결과 벌어지고야 말 부정적인 파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술중독, 일중독, 마약중독, 섹스중독, 일산화탄소 중독.... 물론 최근에 많은 단어들이 세태의 변화와 함께 의미가 일부 변하면서 중독이란 말에도 긍정적인 색깔이 살짝 덧입혀지기도 했습니다. 중독성 있는 미소, 중독성 있는 콘텐츠 등. 어쨋든 뭔가에 중독된 상황에선 자신에 대한 통제가 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니 중독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중독 아닐까요? 맨날..

해외에서 가장 두려운 일

고립무원이라는 것 오래 전 큰 빚을 지고 망해 본 적 있는데 그게 해외에서 벌어졌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물론 국내에서 망해본 적이 없어 어느 쪽이 더 곤란한 상황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해외에서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는 것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교통사고에 휘말리거나 누구에게 보이스피싱을 당해 돈을 사기당하거나 몸이 아파 입원하거나 하면 대개의 경우 도와줄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나고 그 도움의 수위는 그간 내가 쌓은 공덕, 내 재무상태에 비례하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파산해 맨몸으로 벼랑에서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간 살갑게 지내던 사람들이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하죠. 등을 돌리진 않더라도 내가 마치 치명적 바이러스를 가진 보균자라도 되는 것처럼 안전거..

도를 아십니까?

전혀 다른 이야기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이들을 열광시킨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론이 스스로를 나와 나 아닌 것, 나와 그림자, 긍정과 부정,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로 한없이 세분하면서 때로는 스스로를 서스팬스 스릴러 심리 사이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느끼게 만드는 경향이 분명 있습니다. 흉악한 범인을 잡으러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알고 보니 그 범인이 결국 나 자신이더라 하는 이야기들 말이죠. 발상의 전환은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없이 필요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너희들 생각은 다 진부해. 이런 쪽으론 생각해 본 적 없지?’라며 바쁜 사람들 옷깃을 잡아 끄는 게, 그 방식이나 목소리의 톤, 용어의 선택에 따라 짜증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철역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는 ‘도를 아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