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선지자의 승천과 하늘의 보좌 성서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사뭇 중의적 성격을 띕니다. 하늘에 징조가 나타나거나 하늘에 허다한 천군천사가 나타난다는 표현에서의 하늘은 분명 저 위에 있는, 구름이 떠다니는 저 하늘을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든가 하늘의 보좌라는 표현에서의 하늘은 그 하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저 구름 속에 숨어 있다거나 번쩍이는 왕좌가 인공위성 궤도를 떠다니며 지구를 돌고 있다는 뜻이 분명 아닙니다.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저 창공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정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저 땅속 깊숙한 어딘가에 하데스가 다스린다는 죽음과 형벌의 나라 '지옥 '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가져온 것이 '하늘'이라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라는 표현의 진짜 의미..
성서무오설 (聖書無汚設) 창세기는 천지창조의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기독교인들의 우주관을 형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실 우주적 입장에서 보면 지구의 신이 우주 전체를 창조했다는 작은 변방 천체의 지엽적 신화, 그것도 그 동네의 수많은 신화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단군신화나 북유럽신화, 이집트와 그리스의 신화 등 지구에서도 각 지역 민족들마다 천지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환단고기가 그랬던 것처럼 각 민족들은 그 신화를 바탕으로 자긍심을 고취시키며 서로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주장합니다. 그렇듯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져왔고, 그 믿음은 인간이 만든 우주선이 달과 화성, 토성을 ..
옆 사람과 인사 안 할 자유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는 늘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습니다. 군사정권이 사회전반을 짓누르던 시절 교외나 성당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또는 자유가 넘쳐흐르던 해방구처럼 느껴졌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꼭 그리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말시험이나 성질 더러운 학생주임이 없는 곳, 남학교에서는 볼 수 없던 아리따운 여학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조금은 부드럽고 색다른 곳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루브 넘치는 미국 개신교 예배의 선례를 따라 조금씩 소개되던 대중음악 닮은 가스펠송이 급기야 수십 권의 복음성가집으로 묶여 파급되기 시작하고 우후죽순처럼 결성된 수많은 워십팀들이 긴 팔, 다리와 허리를 휘젓고 아이돌풍 댄스와 음악이 선보이기 시작했을 때 엄숙한 ..
신의 뜻 vs 인간의 의지 절기가 다가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국에서 날아와 자카르타에서 설교하던 어떤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큰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설교 중 자카르타의 성도들에게 자기 교회가 화재로 전소되었던 사건을 소개했습니다. 교회가 다 허물어진 건 아니지만 내부가 전소하고 지붕이 내려앉는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 신도들과 함께 교회재건을 위한 기도에 매달렸고 결국 2년 넘는 헌금과 공사 끝에 거대한 교회당이 완전히 개축되어 예전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동안 생활비마저 쪼개 건축헌금을 하며 교회재건을 지원했고 교회당 개축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 마당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던 성도들은 목사님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
예수의 갑질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누가복음 19장 29~34절)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일요일은 Palm Sunday. ‘야자수 일요일’이라고 번역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 종려주일(棕櫚主日)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의 사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직전, 그 정점..
성만찬의 오해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날 이른바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에 축사하며 자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 말한 것은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름의 격식과 상징들을 갖추고 사람들을 줄 세워 쥐똥 만한 빵조각과 한모금도 안되는 포도주스를 나눠주라는 뜻이었을까요? 성찬식의 진정한 의미는 "만찬"에 있어야 할 터인데 성도들로부터는 정성어린, 그리고 아무쪼록 동그라미 많이 붙은 헌금을 기대하는 교회에서 정작 성도들과 나누어야 할 성찬식을 상징적 ‘약식 행사’로 축소하면서 너무 인색을 떤 건 아닐까요? 성도가 교제하고 함께 식사하면서 식탁의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되새기라는 가르침을 교회가 너무 도식화시킨 것 같은데 그게 과연 신의 뜻이었으까요? 아니면 비용과 효율에만 치중한 교회의 지체..
사도신경, 그 비겁함의 근원 주일예배 때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한동안 사도신경을 외면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신경이란 성경에 명백히 ‘이렇게 기도하라’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과 달리 후세의 신학자들이나 교회관계자들이 정리한 ‘로마 카톨릭 교리의 요약’으로 신은 물론 바울이나 예수의 12사도들과는 사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이름을 도용당한 사도들이 신경질 낼 만한 것이라 사도신경일까요? 과거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 기독교인으로서 최소한 이것들만은 지켜야 한다고 여겼던 신앙의 금과옥조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중세 세계관의 중심적 사상이 되면서 오히려 신도들의 신앙을 규격화하고 교회가 사회를 통제하는 통치기제가 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용되고..
찬송가는 왜 버림받았을까? 어린 시절 동국대 후문 쪽에 있던 축대가 높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 예배가 시작될 때면 전자오르간이 잔잔한 선율의 찬송가를 연주했고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교회종이 울리며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리버럴하다는 침례교단이었는데도 예배의 모든 순서는 엄숙하기 그지없었고 지루한 설교는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온 몸에 좀이 쑤시기 시작할 즈음 목사님이 그날 성경구절의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가르침을 역설하며 설교를 막판 절정으로 몰고가면 끝내 졸음을 참지 못했던 집사님들도 어느새 하나 둘 꺠어나기 시작했고 영원과도 같았던 예배가 마침내 끝날 기미를 보이곤 했습니다. 물론 매주 워십팀들이 예배 전 교회 강단에서 분위기를 한껏 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