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진심은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독한 인간이 되려면 2019년 초에 뿌지(Puji)라는 친구로부터 와쎕(whatsapp)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300만 루피아, 한화로 약 25만원쯤 되는 돈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뿌지는 2004년쯤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인데 골프 액세서리를 한국에서 수입해 파는 사람과 오래 일한 친구입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두 곳에서 사업하던 한국인 사장이 결국 태국에 집중하게 되자 뿌지도 결국 정리되었는데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분을 삼키며 자카르타에서 차로 네 시간쯤 걸리는 고향 찔레곤(Cilegon)으로 돌아간 그녀는 결혼해서 애기도 낳았고 작은 가게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0만 루피아를 빌려 달라 한 것은 그 가게가 잘 되지 않아 은행에서 빌..

우리 부장님은 예언자

몰랐던 재능 그 LH 직원들은 직장을 다니면서 투기에 능한 자신들의 재능을 발견했고, 그 재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전파까지 했으니 뛰어난 마케팅 능력까지 발견한 것이라 보입니다. 물론 그 마케팅 활동의 속마음은 함께 돈 벌자는 것보다는 공범자로 만들어 입을 막겠다는 의도도 분명 있었겠죠. 짧은 대기업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대학전공과는 무관하게 조직 안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는 요즘 와서 뒷북 치며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보는 사람 손발이 다 오그라질 정도로 상사들에게 아첨을 떨며 타잔처럼 줄타기의 재능을 보였고 또 어떤 이들은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무색하게 모든 잘못을 부하들에게 돌리며 홀로 살아남는 생존력을 자랑했습니다. 자기가 정확한 상황을 알았다면 절대 서명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이직하고 이혼하는 이유

스트레스의 근원 오늘의 주제는 ‘하는 일의 의미와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방법’인 것 같은데 이미 여러 번 직간접적으로 다루어 본 주제인 것 같아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해 보려 합니다. 아직 남은 주제들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앞으로 풀어 놓을 이야기들을 대략 미리 배분해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 큰 상관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만은 최근 며칠 쓴 글들 평균치의 반쯤 분량에서 끊겠다고도 다짐해 봅니다. 일하는 것만큼 땡땡이가 쾌감 쩌는 것처럼 쓰는 것 못지않게 끊는 것도 중요한 데 말입니다. 스트레스를 다스리려면 그 원인을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일을 두고 말하자면 일이 많아서, 또는 일이 없거나 적어서, 또는 복잡해서, 일이 정기적이지 못해서, 너무 겹쳐 들어와 과중해서, 내가 다룰 ..

고상한 척 위선 떨지 말자

내가 일을 하는 이유 일을 하면서 기뻤던 일들보다는 속 썩었던 일들이 더 많지만 첫 미용가위 대량 오더를 받았을 때가 기억납니다. 2006년쯤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2년 파산하던 당시. 파산이라 해서 바로 무슨 도끼 같은 게 날아와 순식간에 머리통을 찍어 고꾸러뜨리는 게 아닙니다. 파산이란 일정한 기간 동안 감당할 수 없는 만기일이 연이어 찾아오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재해야 하는 시점에서 돈을 내지 못하면서 팔 다리가 하나씩 잘리게 되죠. 사지가 다 잘릴 날은 이미 달력에 새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채 정해져 있었습니다. 난 반드시 죽게 될 테지만 그 전까지, 날 부활시킬 무언가를 미친듯이 찾아 헤맸고 될 성싶은 것들은 없는 돈을 짜내서 간단한 시장테스트를 돌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시도..

시한부 선택

다시 오지 않을 일 1996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쯔비시 상사 인도네시아 지점과 자카르타의 한화공장을 인수한 벨기에 ‘시온’이란 섬유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난 한화그룹에서 의류팀 전원과 함께 퇴사해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관리를 담당하고 나머지 친구들이 한국에서 오더관리과 자재수급을 담당하는 것으로 동업을 약속하고 막 인도네시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동업을 약속한 입에 침도 마르기 전이 아니었다면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관문이 되어 줄 지도 모를 그 기회를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과 2년 후 친구들이 외환위기의 와중에 내게 등을 돌렸을 때 1996년 의리를 지킨다며 스카우트를 거절했던 난 결과적으로 바보천치가 되어버리고 말았..

손절하기 전 고려사항

지나온 시간들이 의미 있기 위해 2019년 라마단 금식월이 끝나고 이슬람력 ‘샤왈’ 월에 들어서면서 이둘피트리 축제와 함께 시작되는 연휴 첫 날, 난 술라웨시 떵가라의 주도 끈다리(Kendari)를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유치장에 들어간 릴리를 도우러 인디아계 영국인 국제변호사와 함께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고작 변호사 통역 정도였지만 그나마 릴리는 꼭 내가 와 주길 바랐습니다 내가 일을 봐주고 있던 회사는 그 여행의 걸림돌이었습니다. 연휴기간 동안의 일정이니 문제가 없어야 했지만 회사의 대표는 점점 더 직원들에게 야박하게 굴고 있었습니다. 대개의 사무실들은 일주일, 공장들은 2~3주를 휴무하며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 보통인 이둘피트리는 사업주 측에서는 짜증나는 시..

명사형 꿈? 동사형 꿈?

꿈을 이루는 삶 안구건조증이 심할 때면 모니터를 보는 게 고역입니다. 눈이 아프다 못해 머리까지 깨질 듯 아파오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 그래? 좀 쉬었다 해” 하며 봐줄 마감이 아닙니다. 오늘 마감인 원고를 어제 간신히 마무리하고 퇴고만 남긴 상태에서 한숨 돌리고 나니 다른 걸 더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도 두통이 사라지지 않아 ‘파나돌’이라 하는 거의 만병통치에 가까운 두통약(겸 해열제 겸 감기약)을 털어 넣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습니다. 어쩌면 이게 옛날에 내가 열망하던 ‘작가’의 생활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이 아니라 보고서를 쓰고 있지만. 군복무를 마쳤을 때 잠시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내가 곡을 들고 나가 노래를 부른 1985년 ..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한 후

진화론 제18회 재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수상작은 입니다. 2016년 8월 5일 자카르타 체류비자를 새로 내기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 중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받은 이 이메일이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이었지만 당시 내 첫 반응은 ‘이제 와서 어쩌라고……?’ 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대학시절 문학상 이후 근 4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날로 쪼들리던 내 입지, 너무 가벼워지다 못해 내 몸까지 달고 우주로 날아갈 기세인 내 지갑, 하지만 중심을 잡아줘야만 하는 가장의 입장. 그런 문제들 사이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3개월 전에 재외동포재단에 글을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을 받는다 해서 내 처지와 주변..

What is BEING MYSELF?

레지스탕스로 산다는 것 ‘나다움’을 얘기하려면 우선 나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난이도가 꽤 높은 주제인 거죠. 잘 생각해 보면 나는 다양한 색깔을 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순된 행동을 하고 같은 사안에 전혀 다른 판단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않기도 했고 옳지 않은 게 자명한 데도 끝내 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통틀어 관통하는 특별한 기조를 생각해 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50여년을 나 스스로를 잘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간신히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합니다. 그건 ‘반항’이란 단어입니다. 뭔가에 부딪히면 돌아가거나 물결 따라 순리대로 흘러가면 될 것을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러고 ..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일

프로젝트의 관건은 디자인과 관리. 작년 11월에서 12월 사이 본국 노동연구원에서 나온 인도네시아 진출 한국기업 실태파악을 위한 설문조사와 현지 모 한국기업에서 현지인 직원 120명이 제출한 회사발전을 위한 제안서 번역작업을 동시에 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크든 작든 그 작동구도와 일의 수행방식을 효과적으로, 실행 가능하도록 디자인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설문조사는 일단 한국인과 한국어 구사하는 현지인 한 명씩 두 명을 묶은 조사팀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각 팀의 케미스트리는 한국인 조장의 능력과 성품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오프라인 조사팀도 하나 운영했어요. 전화와 이메일로 움직이는 조사팀만 운영하는 것이 원안이었지만 문제는 앞서 다른 곳에서 유명한 한인사이트에 두 달간 설문링크를 올려놓고 받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