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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Job-Norm vs Burandang

beautician 2021. 4. 23. 13:32

 

동료과 가족 사이

 

 

 

내게 동료 복은 그리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음, 그게 동료 복이 없었던 게 아니라 동료 자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일했던 대기업에 그렇게도 사람들이 많고 동기들도 많았지만 동료라 말하긴 어려웠습니다. 같은 팀 사람이라 해서 서로 같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연결된 것도 거의 없었습니다. 내가 만드는 옷은 옆 자리에 앉은 친구가 만드는 옷과 원단부터 시작해 주요 부자재 공급선들이 다 달랐고 생산공장도, 해외 바이어도 모두 달랐습니다. 서로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없었고 만나는 사람도, 출장지도, 심지어 평소 주로 사용하는 언어도 틀렸습니다. 결국 같은 공간에 앉아 있을 뿐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셈이었으니 동료가 되긴 애시당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친구들과 나중에 동업을 했으니 말아먹은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동료들이라면 오히려 학창시절이나 군시절 친구들입니다. 우린 분명 같은 세상에 살며 관심사를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같이 해본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란 원래 혼자 하는 것이고 당시 대학에서도 요즘 자주 한다는 조별과제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철저히 혼자 하는 것이었죠.

 

그러고 보니 팀웍을 이뤄보았던 일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합창단을 했었죠. 교회에서는 '외치는 소리'라는 중창단도 했습니다.하지만 그건 흑역사입니다. 같이 노래했던 한 친구는 목사가 되어 오래동안 독일에서 사역하다 정년을 앞두고 귀국했는데 그 친구와도 그 시절 중창했던 얘기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당시 너무 외쳐댔거든요.

 

군시절 동료들은 동료들 맞습니다. 특히 보병들은 각각 따로 할 일들이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자기 맡은 걸 각자 잘 해야 전쟁이 나도 해당 소대나 분대에 죽는 사람이 적을 수 있고 심지어 전투를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무대에서 그 넓은 소대전투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가파른 고지를 뛰어 올라 적진을 점령했는데 14주 훈련을 마치고 나서 발령받은 곳은 멸공관, 직책은 안내장교. 또 다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 각자 자기 일만 하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대체로 그런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합을 맞추고 힘을 합쳤어야 할 첫 자카르타 법인의 동료 한국인들은 서로 못잡아 먹어 으르렁거리다 못해 막판에는 서로 죽이려 들었습니다. 당시 나도 죽이겠다고 으르렁거리기만 하다가 정말 죽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 칼만 맞고 말았습니다. 그때 목덜미를 물어 뜯었어야 한다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동료들만 없었던 게 아니라 친구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인 친구 쿠기미야는 언젠가부터 BSD에서 찌깜벡이란 곳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왕복 네 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그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불가능해지고 말았습니다. 작년 초 그가 심장이 멎은 채 BSD의 병원에 도착해 간신히 소생했지만 뇌를 상하고 만 그를 처음 몇 차례 들여다 보긴 했지만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의 물리적인 거리는 우정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친구나 동료를 얻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파산했던 당시 나를 치명적인 바이러스 보균자 취급을 하며 등을 돌리거나 거리를 유지하던 지인들과의 경험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때 내 바닥을 봤겠지만 나도 그들의 바닥을 보았어요. 난 그때 '인간의 바닥'을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카르타에서도 빠짐없이 교회를 다녔고 최근 몇 년간은 성가대에서 노래도 했지만 내 뒷 줄 사람들 이름은 끝내 외지 않기로 아직도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쪽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요. 

하루에 200명 정도 찾아오는 내 블로그에서 가장 많이 만났습니다. 딴지일보 게시판부터 시작해 인터넷에서 오래동안 글을 쓰다가 몇 군데를 거쳐 결국 내 블로그에 안착한 것인데 그 전부터 알던 아이디가 찾아와 인사하면 그렇게 반가웠습니다.

 

그중 명랑쾌활이란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불한당의 블로그'를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잡놈임을 외치는 나랑 벌써 뭔가 통하는 게 있어 보입니다. 그 친구랑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오프라인에서 만난 건 2015년의 일입니다.

 

베트남을 다녀온 후 내 마용기기 수입사업이 메이의 손에서 소멸되고 말았음을 확인한 후 나도 절치부심했지만 메이도 더 이상 월급을 줄 수 없는 나와 일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다른 일을 찾아 나서봐야 월급을 200불, 300불도 받지 못하는 곳들이 태반이어서 차라리 내가 찾아주기로 하고 늘 글을 쓰던 교민 포털에 메이의 직장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메이는 그로부터 몇년 전 연재했던 '영업사원 활약사'라는 글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열 군데 정도 채용하겠다는 곳이 나섰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나 환상이 깨지는 순간 가치는 급전직하 떨어져 내리거든요. 메이도 그 과정에서 굴욕을 겪었습니다.

 

명랑쾌활이 일하던 공장이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그는 흔쾌히 자신이 책정할 수 있는 최고의 월급을 메이에게 매겨 주었고 왠만한 매니저도 받기 어려운 출퇴근 차를 메이에게 주었습니다. 사실, 그 차가 없었다면 그가 이미 퇴사하고 난 그 회사를 메이가 지금까지 다니고 있지 못했을 겁니다. 

 

이후 그는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500장 급속 번역 프로젝트 당시 상당 부분을 맡아 해결해 주기도 했고 내가 납품 전 심각하게 퇴고해야 할원고를 그에게 보내주면 출판사 편집장처럼 원고에 온갖 표시와 함께 제안문장을 붙여 보내주곤 합니다. 딱 맞는 친구를 오래동안 돌고돌아, 사실 이미 온라인에선 오래 전에 만나고서도 현실세계에서는 얼마전부터 통성명을 하고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 친구라면 '동료'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간 자주 글에 등장했던 릴리나 메이는 논외의 존재입니다.

그 친구들은 친구나 동료가 아니에요.

걔들은 가족입니다.

 

 

2021. 3. 30

 

꼭 그렇지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