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꿈을 이루는 삶 안구건조증이 심할 때면 모니터를 보는 게 고역입니다. 눈이 아프다 못해 머리까지 깨질 듯 아파오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 그래? 좀 쉬었다 해” 하며 봐줄 마감이 아닙니다. 오늘 마감인 원고를 어제 간신히 마무리하고 퇴고만 남긴 상태에서 한숨 돌리고 나니 다른 걸 더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도 두통이 사라지지 않아 ‘파나돌’이라 하는 거의 만병통치에 가까운 두통약(겸 해열제 겸 감기약)을 털어 넣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습니다. 어쩌면 이게 옛날에 내가 열망하던 ‘작가’의 생활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이 아니라 보고서를 쓰고 있지만. 군복무를 마쳤을 때 잠시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내가 곡을 들고 나가 노래를 부른 1985년 ..
진화론 제18회 재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수상작은 입니다. 2016년 8월 5일 자카르타 체류비자를 새로 내기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 중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받은 이 이메일이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이었지만 당시 내 첫 반응은 ‘이제 와서 어쩌라고……?’ 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대학시절 문학상 이후 근 4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날로 쪼들리던 내 입지, 너무 가벼워지다 못해 내 몸까지 달고 우주로 날아갈 기세인 내 지갑, 하지만 중심을 잡아줘야만 하는 가장의 입장. 그런 문제들 사이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3개월 전에 재외동포재단에 글을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을 받는다 해서 내 처지와 주변..
레지스탕스로 산다는 것 ‘나다움’을 얘기하려면 우선 나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난이도가 꽤 높은 주제인 거죠. 잘 생각해 보면 나는 다양한 색깔을 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순된 행동을 하고 같은 사안에 전혀 다른 판단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않기도 했고 옳지 않은 게 자명한 데도 끝내 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통틀어 관통하는 특별한 기조를 생각해 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50여년을 나 스스로를 잘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간신히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합니다. 그건 ‘반항’이란 단어입니다. 뭔가에 부딪히면 돌아가거나 물결 따라 순리대로 흘러가면 될 것을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러고 ..
프로젝트의 관건은 디자인과 관리. 작년 11월에서 12월 사이 본국 노동연구원에서 나온 인도네시아 진출 한국기업 실태파악을 위한 설문조사와 현지 모 한국기업에서 현지인 직원 120명이 제출한 회사발전을 위한 제안서 번역작업을 동시에 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크든 작든 그 작동구도와 일의 수행방식을 효과적으로, 실행 가능하도록 디자인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설문조사는 일단 한국인과 한국어 구사하는 현지인 한 명씩 두 명을 묶은 조사팀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각 팀의 케미스트리는 한국인 조장의 능력과 성품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오프라인 조사팀도 하나 운영했어요. 전화와 이메일로 움직이는 조사팀만 운영하는 것이 원안이었지만 문제는 앞서 다른 곳에서 유명한 한인사이트에 두 달간 설문링크를 올려놓고 받은 ..
고갈된 마음 에너지를 위한 초강력 배터리 내가 힘든 마음을 잘 돌보는 사람인가 스스로 평가해 보려고 하니 우선 마음이 힘들었을 때를 먼저 기억해 내야만 했습니다. 최근 2년쯤을 돌이켜보니 1~2년 치 월세를 목돈으로 내야 하는 임대료, 애들 학비, 차량 할부금 같은 비용들, 먹고 살 생계비, 그걸 충당하기 위해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느냐 소위 생계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짜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날 힘들게 한 게 고작 돈 문제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 애들 학비란,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우리 아이들 말고 자카르타에서 내가 학비를 내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기간을 좀 더 늘려 보았습니다. 10년간 손잡았던 한국 공급선과 2013년 깨지고 이듬해 친구의 니켈사업까지 망가지면서 대안을 찾아 베트남에 가던..
납치범에 대한 단상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어떤 이들은 사과나무를 심으러 갈지 몰라도 골방에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정이 바보 같아 보일지 모릅니다. 사실 세상이 멸망할 때엔 버둥거리며 뭘 하려 하든 똑같은 바보짓입니다. 1997년 불어오기 시작하던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를 때린 것은 이듬 해인 1998년이었고, 그것은 시위가 벌어지던 뜨리삭티 대학교에서 군경이 쏜 총에 학생 사망자가 나오면서 한 편으로는 수하르토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민주화운동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카르타를 마치 전쟁터처럼 만들어 버린 도시 빈민들의 폭동으로 번졌습니다. 자카르타에 살던 교민들로서는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난 한국의 동업자들이 받은 봉제오더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
이건 거의 일제와 군사독재의 논리 뭔가 일을 일답게 시작하려면 우선 하려는 일의 제목을 정하고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뭔지도 모르는 걸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이번 챕터 관련 세바시 강사로 나온 가톨릭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긍정학교 교장인 채정호 박사의 이야기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건 그 단어의 정의에 너무 힘이 들어가 상식적인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전반적인 강의내용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듯했습니다. 그는 베트남전 포로로 8년을 버티고 마침내 살아 돌아온 스톡데일 미군 중령이 '긍정적인 사람은 다 죽었다'고 증언한 것을 조명합니다. 곧 풀려 날 수 있을 것이란 제멋대로의 기대를 품었던 미군 ..
내 친구 메니에르 2008년 전후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씩 하던 미용실 방문판매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매에 비해 특별히 매출이 느는 것도 아닌데 방판조직을 꾸리고 영업비를 지불하고 오토바이를 추가로 사는 등 비용만 자꾸 늘어갔습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직원들이 직접 우리 미용가위를 들고 자카르타와 반둥 시내의 미용실 수백 군데를 돌아다니니 지면광고를 내는 것보다 홍보효과가 획기적으로 높다는 것이었죠. 문제는 현금수금을 하는 상황이라 매일 정산하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쉽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밤늦더라도 직원들이 모두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수금한 돈을 보고서, 들고 나갔던 남은 물건들과 제출받고 퇴근하는 시스템이었죠. 영세기업 돌아가는 게 그랬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사고는 수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