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빨리 괴물이 되고 싶다. 가장 힘든 시련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후폭풍을 맞는 것, 특히 그 후폭풍을 내가 아닌 내 가족들이 맍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치기어린 정의감에 빠져 살던 시절엔 누가 날 좀 욕하고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 정도는 당연히 견뎌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70~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누구나 평균치의 악의와 폭력에 노출되어 살았고 어느 정도 면역력도 가지고 있었으니 내가 조직논리와 집단적 이기심, 대기업의 특성이 최대치의 탐욕 같은 것에 동조하지 않고 맞서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동조하는 정도가 적극적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태클을 당하고 떄로는 보복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일상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일말의 ..
두려움은 반드시 극복되는 것 최근 십 수 년을 막 살다 보니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인간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 리 없으니 겁 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어딘가 고장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도 어딘가 고장난 겁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분명 있습니다. 그걸 직시하고 싶지 않을 뿐이죠.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트라우마라고 하는 건 트라우마가 아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일부러 눈을 돌리지 않는 곳, 하지만 마주치는 순간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 그게 트라우마라고요. 진정한 두려움도 그런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두렵기에 잊어버려야만 했던 것. 어쩌면 내가 자주 꾸는 꿈 속에 두려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복잡한 스토리의 꿈 속에서 내가..
세상의 순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문제였습니다. 개중엔 노골적으로 무례하고 오만한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는 데도 그 자리나 일의 매뉴얼이 상대방을 화나게도 황당하게도 만들곤 해요. 인도네시아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면 안되는 일이 그리도 많습니다. 은행에서는 오후 2시 이후에 문을 닫은 것도 아닌데 달러화 입금도 출금도 해주지 않습니다. 룰이 그렇데요. Giro라고 부르는 어음을 현금화하려고 가면 어떤 은행은 9시반 이전에 와야만 한답니다. 자기들은 8시반에 문을 열면서요. 차량 부품이나 기계 부품이 고장 나면 어디든 가서 수리받는 게 보통이지만 여기선 거의 대부분 새 걸로 바꿔 끼우라 합니다. 새 걸 사서 끼우는 건 본질적으로 수리라고 할 수 없죠. ..
라~때는 말이지 중독이란 어떤 일을 한 번 시작하거나 빠져들고 나면 그 해악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중단할 수 없거나 멈추거나 헤어나오기 힘든 상태, 또는 그렇게 만든 상대를 지칭하는 말이죠. 그리고 그 어감 자체가 그 결과 벌어지고야 말 부정적인 파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술중독, 일중독, 마약중독, 섹스중독, 일산화탄소 중독.... 물론 최근에 많은 단어들이 세태의 변화와 함께 의미가 일부 변하면서 중독이란 말에도 긍정적인 색깔이 살짝 덧입혀지기도 했습니다. 중독성 있는 미소, 중독성 있는 콘텐츠 등. 어쨋든 뭔가에 중독된 상황에선 자신에 대한 통제가 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니 중독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중독 아닐까요? 맨날..
고립무원이라는 것 오래 전 큰 빚을 지고 망해 본 적 있는데 그게 해외에서 벌어졌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물론 국내에서 망해본 적이 없어 어느 쪽이 더 곤란한 상황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해외에서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는 것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교통사고에 휘말리거나 누구에게 보이스피싱을 당해 돈을 사기당하거나 몸이 아파 입원하거나 하면 대개의 경우 도와줄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나고 그 도움의 수위는 그간 내가 쌓은 공덕, 내 재무상태에 비례하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파산해 맨몸으로 벼랑에서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간 살갑게 지내던 사람들이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하죠. 등을 돌리진 않더라도 내가 마치 치명적 바이러스를 가진 보균자라도 되는 것처럼 안전거..
전혀 다른 이야기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이들을 열광시킨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론이 스스로를 나와 나 아닌 것, 나와 그림자, 긍정과 부정,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로 한없이 세분하면서 때로는 스스로를 서스팬스 스릴러 심리 사이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느끼게 만드는 경향이 분명 있습니다. 흉악한 범인을 잡으러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알고 보니 그 범인이 결국 나 자신이더라 하는 이야기들 말이죠. 발상의 전환은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없이 필요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너희들 생각은 다 진부해. 이런 쪽으론 생각해 본 적 없지?’라며 바쁜 사람들 옷깃을 잡아 끄는 게, 그 방식이나 목소리의 톤, 용어의 선택에 따라 짜증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철역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는 ‘도를 아십..
해리성 인격장애 긍정적인 자신을 '진짜 나'로, 부정적인 부분을 '가짜 나'로 나누는 건 사실 매우 건강하지 못한 발상입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공적이든 실망스러운 실패투성이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스스로의 실체로 인정해야만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죠. 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자신만이 유일한 피해자이고 세상 모든 이들이 자길 시기하는 가해자들이라 생각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주변에 크고작은 물의를 빚으면서도 오직 자신만이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모든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의의 화신이라 믿는 동안엔 절대 세상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왜곡된 세계관이 현실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뿐 아니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우린 그게 필요합니다. 난 과거 찌질하기 그..
쌈닭의 트라우마 막 영화진흥위원회에 2월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동향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원래 5일 마감인데 하루 먼저 보냈으니 선방한 겁니다. 정신건강에도 무지 도움이 되죠. 이제 남은 마감은 데일리에 보낼 괴담뿐. 오늘은 밤새 귀신들 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할 판입니다. 요즘 인도네시아에서는 코로나 직격을 맞은 영화관에 1년 가까이 손님이 들지 않아 극장흥행을 기대할 수 없는 일반 영화제작사들이 OTT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신작영화를 개봉하면서 종래의 스튜디오 상영관에서 온라인으로 영화판의 주도권이 옮겨가는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스타워즈 제국군의 최종병기 데스스타처럼 접근하며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아마존프라임, 라이온스게이트 플레이 같은 세계적 거물들에게, 강력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