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진심은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beautician 2021. 4. 13. 13:19

독한 인간이 되려면

 

2019년 초에 뿌지(Puji)라는 친구로부터 와쎕(whatsapp)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300만 루피아, 한화로 약 25만원쯤 되는 돈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뿌지는 2004년쯤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인데 골프 액세서리를 한국에서 수입해 파는 사람과 오래 일한 친구입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두 곳에서 사업하던 한국인 사장이 결국 태국에 집중하게 되자 뿌지도 결국 정리되었는데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분을 삼키며 자카르타에서 차로 네 시간쯤 걸리는 고향 찔레곤(Cilegon)으로 돌아간 그녀는 결혼해서 애기도 낳았고 작은 가게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0만 루피아를 빌려 달라 한 것은 그 가게가 잘 되지 않아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그 와쎕이 오기까지 10년 넘도록 우린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니 정황상 뿌지는 돈이 급해 자기가 아는 전화번호 모두에게 문자를 보내 돈을 빌려 달라 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난 한때 25만원이 아니라 2500원도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뿌지처럼 전화번호부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손을 벌려 볼까 생각한 것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결국 추리고 추린 몇몇 사람들에게 연락을 내 간곡히 부탁해 보았는데 아주 절대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하던 친구들까지 매정하게 거절하거나 연락을 끊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뿌지가 처한 상황은 전혀 할 수 없지만 그런 문자를 보낸 절박함만큼은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난 다른 건 묻지도 않고 구좌번호를 물은 후 바로 요청받은 금액을 보내주었습니다. 어차피 크지 않은 돈이었고 마침 당시엔 곤궁하던 시절을 막 벗어나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뿌지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해왔지만 난 그녀가 하는 사업이 좋은 성과 맺기를 빌며 실로 오랜만에 좋은 일을 했다는 높은 자존감을 느꼈습니다.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갑니다. 뿌지는 몇 번 더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요청하는 금액은 들쑥날쑥 했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처음 돕기로 마음먹었으니 좀 더 도와보자고 생각하고 몇 번 더 송금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뿌지에게 빚을 돌려받을 생각은 애당초 없었습니다. 아쉬운 돈이라면 애당초 빌려주지 않는 게 맞았으니까요. 문제는 그걸 뿌지가 알아버린 모양이었습니다.

 

어느날 뿌지가 500만 루피아를 요구했는데 그날은 그만큼의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침묵하자 다음날 뿌지는 요구하는 금액을 200만 루피아로 낮췄습니다. 느낌이 싸~했어요. 이틀 더 지나니 80만 루피아라도 보내달라는 문자가 20통 넘게 들어왔습니다. 난 이마를 짚었습니다.

 

내가 또 호구 짓을 했구나.

 

내가 답변을 하지 않자 뿌지는 2~3일 동안 수백 통의 문자를 보내면서 그간 빌린 돈을 어떻게 언제까지 갚을 것이며 이번에 돈을 빌리지 못하면 자기에게 벌어질 온갖 무시무시한 일들을 입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뿌지가 한 행동은 중고나라 밴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어요. 제품 판매가 불발되어 가격 내려 재업합니다~

 

 

결국 내 진심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세상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2020년 말에 오랜만에 다시 와쎕을 보내온 뿌지는 다시 500만 루피아를 빌려 달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흘쯤 지나자 금액을 뚝뚝 떨어져 또 80만 루피아까지 떨어졌습니다. 어차피 연말이어서였을까요? 난 두말없이 요구한 금액을 송금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입금을 확인한 뿌지는 또 다시 며칠 간 수백 통의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건 물론, 자기 사업계획을 얘기하고, 누굴 나한테 소개해 주겠다고 하고……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채 혼자서 감상에 사로잡혀 함부로 도운 결과 오히려 그를 잃고 말았습니다.

 

내가 지난 연말에,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송금을 했을 때 뿌지는 반응은 어땠을까요? 고마워했을까요? 아니면…, ”! ! 이 호구가 또 걸려 들었어!” 이랬을까요?

 

난 내가 독하지 못해 결국 하던 사업을 끝내 살리지 못했던 거라 생각해 왔습니다.

다시는 내 가족들에게 예전의 그 고생을 반복시키지 않기 위해 더 이상 호구가 되어선 안된다고 늘 독한 인간이 되자를 주문처럼 외우면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2016년 재외동포문학상에 보낸 소설 제목이 <지독한 인간>이었을까요.

 

늘 실패하고 마는 다짐입니다.

 

 

 

2021.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