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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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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옛 경쟁상대를 만날 때 드는 생각

beautician 2021. 4. 14. 13:02

내가 겪어 본 경쟁의 시작과 끝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경쟁상황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두 개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중 하나는 대기업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입대 전 취직했던 회사에 돌아가 보니 6개월 전에 입사해 일하고 있던 일단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입사로는 내가 빠르지만 일은 그 친구들이 먼저 시작했으니 서열을 매기기 애매했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비슷해 결국 모두 친구 먹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좀 껄끄러운 한 명이 있었어요. 그는 다른 동기들보다 두 살쯤 많은 그는 6개월 방위를 마쳤으니 사실은 자기 또래보다 입사가 4년쯤 늦었는데 내가 나온 대학의 중국어과를 나와 동문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그 친구가 나랑 같은 의류팀에 배정되어 난 일본수출담당, 그 친구는 내수담당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입사가 늦었다는 자의식 때문이었는지 그는 매번 사람들 앞에서 내 형, 선배 행세를 하려 들어 그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 각 팀에 한 명씩 있는 고졸 경리담당 남녀 직원들을 자기 셔틀처럼 부리며 수틀리면 비상구로 끌고 가 입술이 터지도록 뺨을 갈기곤 했습니다. 그게 그렇게나 보기 싫었습니다. 그도 내가 자길 삐딱하게 보고 있다는 걸 몰랐을 리 없습니다.

 

회사에서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데 앙금이 쌓이면 결국 터지는 법이죠. 그게 취기가 얼큰이 오른 부서회식 자리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는 내가 옆팀 과장님과 얘기하고 있던 대화를 가로채며 내 예의를 문제삼았는데 그게 그렇게 눈꼴이 시었습니다. “얘가 사회생활 잘 몰라서 상사들이랑 얘기하는 예의를 몰라요. 형인 제가 잘 교육시킬게요.”

 

술을 먹지 않았으면 내 반응은 아마 달랐을 겁니다. 하지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형 좋아하고 앉았네. 이봐요. 난 당신 같은 형 없으니 우린 남남 합시다. 그딴 쉰소리 하지 말고.” 워딩이 정확히 이랬는지는 잘 기억 안나지만 아무튼 이런 취지였어요.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면서 회식자리 모든 사람들 시선이 입사 1년도 안된 두 신입사원에게 쏠렸다. 내 기억에 그때 정작 사업부장님은 먼저 집에 가셨던 것 같습니다. 상을 뒤엎지는 않았지만 거의 주먹질 직전까지 치달았던 그날 상황은 이후 우리 두 사람의 관계와 앞으로의 회사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네가 장교 출신이라고 회사에서도 장교인줄 알아?” 그가 그렇게 소리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순기능이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는 나한테 형이나 선배행세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고 내가 “거, 그만 좀 합시다”라고 한 마디 하면 그는 으르렁거리면서도 고졸사원들을 비상구로 데리고 가는 걸 멈추곤 했습니다. 무례한 상대방이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하는 게 내가 만만찮은 놈, 위험한 놈이란 걸 과시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요?

 

시간이 흘러 내가 인도네시아 지사로 날아올 때 그는 신장성 우룸치로 갔다가 거기 지사장을 때려 눕히는 사고를 치고 맙니다. 왠지 모르지만 해외에 나간 그는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잘릴 줄 알았는데 그간 온갖 아첨으로 그가 줄을 잡고 있던 그룹회장의 고교 동창이 당시 기획실장으로 있어 그는 오히려 홍콩 옆 샨토우 일인 지사장으로 영전하는 반전드라마가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행을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이번엔 샨토우에 출장 온 홍콩 법인장에게 뭐가 뒤틀렸는지 라이트훅 풀스윙을 한 겁니다. 차-부장급인 우룸치 지사장과 달리 홍콩 법인장은 상무급이었는데 임원의 어금니를 부러뜨린 일개 과장은 회장 고교동창 정도 줄로도 더 이상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만 부탁할게. 꼭 좀 도와줘.” 본사를 떠난 후 단 한 번도 나와 교류가 없었던 그가 샨토우 라이트훅 사건 이후 그런 전화를 걸어왔는데 본사와 전 세계 지사에 흩어져 있는 동기들에게 자신을 구제해 달라는 탄원서를 인사과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의원면직 형식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고 당시 이미 자카르타에서 지옥을 겪고 있던 나도 곧 그 뒤를 따랐습니다.

 

 

라이트훅  

 

또 하나의 장면은 자카르타에서 켄트(Kent)라는 화교계 친구를 처음 만나던 순간입니다.

 

내가 미용가위 시장에 뛰어들기 전 그는 그 작은 틈새시장의 유일한 플레이어였습니다. 그가 나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그는 소매시장을 틀어쥐고 있었으므로 내 미용가위를 그의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레알, 마카리조 등의 브랜드에 납품하기 전, 도매시장에 제품을 공급하기 훨씬 전, 그러니까 파산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03년 쯤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양아치처럼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켄트의 표정엔 거만함과 혐오 같은 것이 잔뜩 범벅되어 있었습니다. 자기 혼자서 10년쯤 잘 해오고 있던 시장에 갑자기 뛰어든 외국인 경쟁자가 반가웠을 리 없습니다. 그는 내가 받을 수 없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결국 협상을 깨고 말았는데 그에 대한 내 첫인상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내가 도매시장을 거의 다 먹어버리고 직원들을 구해 자카르타와 반둥에서 미용실 방문판매까지 시작하자 바짝 위협을 느낀 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장에서 우리 제품들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이란 원래 그런 겁니다.

 

그 친구를 몇 개월 전에 다시 만났습니다. 와쎕(whatsapp)과 페이스북을 통해 그가 줄기차게 친구신청을 하고 미팅을 요구했는데 2015년에 사실상 미용기기 수입판매 사업을 접은 내가 굳이 그를 만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강력히 강권하여 결국 팬데믹 와중에 끌라빠가딩 우리 집 근처 인디아식 카페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까맣게 염색한 그는 이제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좁은 시장에서 비슷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경쟁한 우리들은 거의 비슷한 경험을 했고 여러 번 거의 똑 같은 사고를 겪었습니다. 현장에서 온갖 사고를 친 직원들이 수금한 돈을 들고 튀는 금전사고들 말입니다. 여전히 그 업계에 남아 있던 그는 혹시 내가 한국의 헤어클리퍼(바리깡) 업체들을 소개해 줄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난 흔쾌히 동의하고 모든 자료를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직접 전화를 걸어 켄트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십 수년을 시장에서 경쟁했던 켄트는 그만큼 오래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업계에서 서로가 겪었던 모든 사건사고들은 오직 우리들만이 속속들이 알고 가장 잘 이해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지 미용기기 수입판매 시장엔 이제 좀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뛰어들었고 켄트는 그들과 계속 경쟁하고 있지만 난 당연히 켄트를 응원하고 필요하다면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저 우룸치 출신 권투선수와 켄트와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나름 경쟁을 마친 후의 감정이 이렇게나 다른 걸까요? 경쟁의 건전성 때문에? 아니면 경쟁하던 시기의 나이와 마음가짐 때문에?

 

그리고 오늘 난 이제 누구와 경쟁하고 있는 건지도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바리깡질의 표본 

 

2021.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