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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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 않을 일
1996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쯔비시 상사 인도네시아 지점과 자카르타의 한화공장을 인수한 벨기에 ‘시온’이란 섬유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난 한화그룹에서 의류팀 전원과 함께 퇴사해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관리를 담당하고 나머지 친구들이 한국에서 오더관리과 자재수급을 담당하는 것으로 동업을 약속하고 막 인도네시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동업을 약속한 입에 침도 마르기 전이 아니었다면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관문이 되어 줄 지도 모를 그 기회를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과 2년 후 친구들이 외환위기의 와중에 내게 등을 돌렸을 때 1996년 의리를 지킨다며 스카우트를 거절했던 난 결과적으로 바보천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아직도 그 일을 책망합니다.
그런 비슷한 제안이 지난 월요일 두 번째로 찾아왔습니다.
난 1996년 당시처럼 더 이상 새파란 청춘도 아니고 그동안 직장인으로서도 사업가로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제안을 해온 회사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곳도 아닙니다. 대만계 투자회사로 철, 망간, 니켈 등을 취급하여 채굴한 광물을 3,000~5000톤 바지선 단위로 제련소로 운송해 거기서 순도를 높인 후 수출하는 회사입니다. 작년에 니켈 만 바지선 천 개를 띄웠답니다.
평생 레인웨어 농산물, 바닥용 목재, 미용가위 등을 취급하다가 몇 년 전부터 전업작가로 돌아선 사람에게 뜬금없이 광물을 취급하는 회사가 스카우트하겠다고 나선 것은 술라웨시에서 니켈광산을 하는 내 친구가 고집불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니켈을 잘 알아서 그런 게 아니고요.
드러난 빚만 2백만 불이 넘는데 릴리의 성향상 숨어있는 빚은 얼마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걸 도와주겠다는 사람에게도 굳이 밝히지 않는 건 그게 말도 못할 엄청난 금액이거나, 릴리 스스로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 쉽습니다. 회계과 출신이면서도 모든 게 주먹구구식인 릴리는 이쪽에서 선금을 받아 저쪽 빚을 막는 식으로 일하며, 선금받은 일을 수행하지 못해 빛이 더 늘어나는 식입니다. 15년은 족히 되도록 니켈 광산 다섯 개를 가지고 쉴 새 없이 컨트랙터들이 니켈을 퍼 나가는데 광산주가 돈을 벌기는커녕 빚더미 위에 앉았다는 게 이해가 안됩니다. 릴리는 사치를 하지도, 돈을 빼돌리지도 않는데 말이죠. 그녀는 그저, 매니지먼트의 망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계속 소송을 당해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드는 거죠. 소송을 걸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그 모든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번 제안을 해온 저 대만회사 뿐입니다. 표면에 올라온 빚들을 모두 해결한 후 릴리가 협조해 주면 6개월 안에 그 비용을 모두 보전하고 릴리도 7개월 째부터는 반출하는 물량에 대한 로열티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매장량은 약 2년치. 결국 이 회사와 계약하면 2년 정도 근무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릴리는 술라웨시에 망간 광산이 있고 파푸아 소롱(Sorong)에도 섬 하나가 통째로 니켈광산으로 허가가 나 있습니다. 광구들이 더 있으니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좀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릴리가 말을 듣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기 남편과, 그 남편을 소개해 준 나 밖에 없는데 벨기에인인 남편이 스리랑카-상해를 거쳐 지금 베트남 다낭에 있으니 대만 업체가 왜 자카르타에 있는 나한테 왔는지, 내게 뭘 원하는 지 이미 자명합니다. 릴리가 더 이상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틀어쥐고, 아직까지 밝히지 않은 모든 문제들을 파헤쳐 모든 상황을 투명하게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내가 2002년에도 그걸 못해서 망했습니다. 이번엔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다음 광산업무를 실제로 관리할 수 있을까요?
하나 분명한 것은 저 대만업체에게 릴리의 광산들은 중요한 당면과제이긴 하지만 그 회사가 진행하고 있는 여러 사업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지분을 산 것도 아닌 마당에 안되면 그만 둘 수도 있는 아이템이란 거죠.
그리고 릴리가 살아남고 사업이 살아남으려면 릴리가 저 사람들에게 사고를 쳐서는 안된다는 것도 분명한 일입니다. 저들은 릴리를 감옥에 처넣었던 회사의 물건들도 사서 그 회사가 돈을 벌게 만들어주고 거기서 이익을 남겨 릴리도 돈을 벌게 하는 방식으로 현장의 평화를 도모하려 하는데 그건 누가 봐도 최선의 솔루션입니다.
그리고 나로서도 원래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술라웨시에 들어가 돈이 되든 않든 일단 릴리를 도와 일을 정리해 주려 했는데 대만업체가 나서 명함에 찍기 향기로운 직책과 응분의 급여도 주겠다니 갑자기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술라웨시 현장에서 최소한 한 달의 반절은 보내야 하니 그 제안을 수락하려면 자카르타에서 내가 프리랜서로 일을 봐주는 곳의 손을 놓거나 절충을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한 대표가 성사되기 어려운 일을 진행하는데 대부분의 사항들을 비대면으로 진행하지만 몇몇 실무협의와 관련부처 장관이나 고위관리 미팅 같은 곳에 통역으로 따라가 줘야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일이 성사되든 그렇지 못하든 그에게 징검다리에 불과한 나에겐 전혀 장래성이 없지만 최소 1년을 돕기로 약속하고 막 3개월 차에 들어섰습니다. 그나마 올해 초 생계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짜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잡게 된 일입니다. 여기서 손을 놓는다면 의리를 저버리는 것일까요? 조율할 여지는 없을까요?
또 하나는 이번 4월 9일 입찰 들어가는 8개월짜리 콘텐츠진흥원 조사용역 작업입니다. 물론 작년에도 그런 것처럼 내정업체에 밀려 입찰에서 떨어지기 쉽겠지만 혹시 낙찰되면 4개국 7개 문화 항목에 대한 보고서를 국가별로 매달 생산하는 일이 차질 없도록 어느 한 사람이 관리책임의 독박을 쓰고 끊임없이 확인하고 독촉하고 조율해야 합니다. 술라웨시 일을 맡는다면 이건 아예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장기적으로 생각한다면 한번 뺏아오면 앞으로 몇 년간은 꽤 장기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일이고 ‘전업작가’라는 정체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포기해야 할까요?
목요일까지는 대만업체에 답변을 줘야 합니다.
무엇이 좋은 회사인가, 어떤 것이 할 만한, 또는 해야만 할 일인가, 이런 질문들이 피부에 와 닿는 정도가 아니라 바늘처럼 폭폭 박히는 시간입니다.
2021.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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