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고상한 척 위선 떨지 말자 본문
내가 일을 하는 이유
일을 하면서 기뻤던 일들보다는 속 썩었던 일들이 더 많지만 첫 미용가위 대량 오더를 받았을 때가 기억납니다. 2006년쯤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2년 파산하던 당시.
파산이라 해서 바로 무슨 도끼 같은 게 날아와 순식간에 머리통을 찍어 고꾸러뜨리는 게 아닙니다. 파산이란 일정한 기간 동안 감당할 수 없는 만기일이 연이어 찾아오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재해야 하는 시점에서 돈을 내지 못하면서 팔 다리가 하나씩 잘리게 되죠. 사지가 다 잘릴 날은 이미 달력에 새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채 정해져 있었습니다. 난 반드시 죽게 될 테지만 그 전까지, 날 부활시킬 무언가를 미친듯이 찾아 헤맸고 될 성싶은 것들은 없는 돈을 짜내서 간단한 시장테스트를 돌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시도해 봤던 수많은 아이템 중에 미용가위가 있었습니다.
예정된 시간이 도래하자 예상했던 대로 난 사지가 잘려 저자거리에 버려졌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던 중 잘린 팔다리가 대충 서로 붙어 자리를 잡으며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그 과정과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부활이고 뭐고 그만둘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용가위는 끊어질 듯 말 듯 명맥을 이어 갔습니다. 도매상들은 말도 안되는 조건으로 가격을 후려치고 결재조건도 판매분에 대해 2~3개월 후에 돈을 주겠다고 했으므로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습니다. 그렇다고 외국인이 미용실들을 다니며 방문판매를 하는 것도 간단치 않았습니다. 당장 자존심의 문제보다 비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컸으니까요. 그래서 살론프로(Salon Pro)라는 미용사들, 미용실 주인들이 보는 잡지에 6분의1 지면 크기의 광고를 내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2년 넘게 광고를 실었지만 주문이 들어오는 것은 한달에 두 세 세트 정도였습니다. 많아야 열 세트. 그걸 붙잡고 수렁에서 벗어나기엔 너무 약한 지푸라기였습니다. 그런데 3년 차 되던 해(그 효과도 없는 광고를 3년간 돈 내고 실은 나도 참 대단합니다) ‘마카리조’라는 현지 헤어 코스메틱 브랜드에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자기들 제품을 사는 미용실에 포인트제를 실시해 적정 포인트를 넘으면 사은품을 증정하는데 내 미용가위도 사은품 중 하나로 검토하고 싶으니 견적서를 넣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2년 간 100세트도 팔지 못한 내 제품을 왜 유명 마용 브랜드가 관심을 가진 걸까요?
내 미용가위가 인지도만 없었지, 꽤 품질이 좋았어요. 미용가위 날이 면도날보다 날카롭다는 것도 그 당시 알았습니다. 그래서 몇 명 되지 않지만 내 가위를 산 미용사들은 매우 만족해했고 주변에도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지도 문제는 2년 넘게 실은 광고가 주효했습니다. 왠만한 미용계 사람들에게 내 브랜드가 제법 친숙해진 거죠. 한국처럼 미용기기 판매처가 서시내 곳곳에 포진한 게 아니라 인도네시아엔 도시마다 한 군데에 도매상들이 모여 있는 게 보통인데 내 가위를 사러 도매상에 간 사람들은 모두 허탕을 쳤습니다. 당시 도매시장에 들어간 제품은 단 한 세트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크롬과 코발트가 섞인 440C 히타치 강철을 재료로 절단용 민가위와 숱을 치는 숱가위 세트로 구성된 내 미용가위는 ‘꾸준한 광고를 내는 좋은 품질의 제품인데 시장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신비로운 제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 호들갑을 떨고서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견적을 낸지 몇 달 후에야 마카리조가 첫 오더를 냈습니다. 500세트. 난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한 달에 두 세 개 팔던 집에 로또가 터진 겁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마카리조의 후속 오더가 계속 들어오는 와중에 그 경쟁사인 프랑스 브랜드 로레알에서도 견적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시연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까짓껏 모델을 한 명 수배해 멋진 기술과 결과물을 보여주는 대신 가위가 얼마나 잘 드는지, 절단방식이 어떤 지에 중점을 둔 시연을 했습니다. 그 결과 모델 머리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로레알도 200세트씩 주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엔 내 미용가위를 거절했던 빠사르바루의 도매상들도 앞다투어 전화를 걸어 주문을 냈습니다.
그런 상황에 힘입어 기약도 없어 보이던 빚을 갚기 시작했고 파산의 수렁에서 서서히 기어 나오면서, 대학에 보낼 수나 있을까 싶던 아이들을 싱가포르와 호주로 유학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았지만 당시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 비슷한 일이 글을 쓰면서 소소하게 벌어집니다.
하려고 했던 모든 일들이 모두 무너져 결국 글 쓰는 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리고 글을 써서는 절대 생활이 되지 않을 거라고 절망하고 있을 때 글이 정말 돈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단한 작가가 된 것도 아닌데, 그것도 보고서를 주로 쓰는 반쪽짜리 작가지만 어쨌든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글 쓴다고 돈이 나오냐~라는 취지의 바가지를 평생 긁던 아내도 요즘은 기특하다고 등을 토닥거려 줍니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일을 하는 목적이 주변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데에 있어야 한다는 세바시의 강연은 나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긴 하지만 초심을 너무 지나쳐버렸습니다. 우리가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비로소 한 사람 몫을 하게 되었다는 안도감, 부모님의 부담을 덜고 오히려 집안에 도움이 되겠다는 자존감과 포부. 그런 초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나도 아직 잊지 않은 그 초심을 세바시의 강연자가 잊어버린 듯 보였습니다.
일을 하는 이유와 자신의 일이 타인의 성장에 보탬이 되었냐는 고상한 질문을 너무 형이하학적인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일, 즉 노동은 반드시 그 대가를 기대하는 행위이니 난 돈을 벌려고 일하는 속물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 위에 든 내 경험에서 내가 돈이 벌리는 것만 가지고 기뻐했을까요? 그걸 통해 빚을 갚고 가정을 안정시키고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었으니 기뻤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변사람들도 도울 수 있고 성장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나와 내 자신이 우선 제자리를 잡고 안정된 상태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남을 위해 열심히 일한 끝에 난 망해버리는 그런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impairment는 손상차손, provisions는 충당부채 등 발음도 힘든 어려운 회계용어로 점철된 어떤 회사의 회계보고서를 번역한 후 입금된 번역료를 보고 기뻤던 이유는 간신히 홍수에 잠기지 않을 집으로 이사시킨 차차와 마르셀에게, 인포르마(Informa)나 이케아(IKEA)에서 파는 것처럼 멋진 디자인은 아니지만 이젠 좀 진득하게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상을 각각 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식탁이 홍수에 잠겨 다 못쓰게 된 후 바닥에서 밥을 먹던 아이들에게 작은 식탁도 하나 사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걸 사준 것이 기뻤을까요? 아니면 그럴 수 있도록 번역료를 번 게 기뻤을까요? 거기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인 명제와 목적을 갖다 붙이는 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최소한 고상한 척하려고 위선 떠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남의 주머니에 든 돈 빼먹기 쉽지 않은 이 세상에서 돈 버는 건 분명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202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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