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협업: 성공사례, 실패사례

beautician 2021. 4. 16. 11:40

<판데르베익 호의 침몰>

 

미낭까바우 전통행사

 

월말이 다가오면 마감에 쫓기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월말은 평소보다 좀 더 여러 개의 마감이 걸렸습니다. 4월 1일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팀에 제출해야 할 <2020년 인도네시아 영화산업결산보고서>, 데일리인도네시아의 <무속과 괴담 사이> 여덟 번째 연재 원고 마감이고 4월 5일은 영진위 국제교류팀에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3월 동향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영진위나 출판진흥원 보고서를 쓰려면 평소에 검색해 모아 놓은 광범위한 관련 기사와 자료들을 마감 열흘 전쯤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사흘 전쯤부터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야 마감일에 나름 형태와 함량을 갖춘 원고가 완성되죠. 매월 20일에 마감하는 출판진흥원의 월간 모니터링 보고서도 그런 식이니 사실 보고서 걱정을 잠깐 잊는 기간은 마감 직후 5일씩, 한달에 열흘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비정기적인 원고들을 마감해야 하는데 주간 단위로 계약하는 인도네시아 정치사회 기사번역은 한동안 매일 제출해야 하고 몇몇 한국 매체들에 보내는 기사들은 그나마 내가 시간조절을 할 수 있습니다. 개인 프로젝트로 시작한 <시티 누르바야(Sitti Nurbaya)>라는 1920년대 인도네시아 초창기 소설의 번역과 한 외대 명예교수님과 하기로 한 <리콴유 평전>은 좀처럼 진도를 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마감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감이란 결과물을 제때 얻어내기 위한 필요악 같은 것입니다.

 

<시티 누르바야>

 

그런데 당장 3월 29일에도 마감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The Sinking of Van Der Wijck)이라는 책의 번역후기입니다.

 

번역원고를 넘긴 것이 작년 9월의 일인데 10월에 외국어 표기법 인덱스 정리를 한 차례 한 후 왠지 몰라도 오래 침묵하더니 5월 출간을 목표로 4월 하순에 역자교를 하겠다며 3월 말까지 번역 후기와 작가소개, 원서 출판 당시의 현지반응, 의의 등을 정리해 달라는 연락을 얼마전에 받았습니다. 책 한 권이 나오는 건 정말 대단한 인내를 가지고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 같습니다.

 

번역 후기에 언급할 몇몇 사람들 중 페페(Pepe)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반둥 파라향안 대학(Parahyangan University)를 나와 한양대 어학원에서도 1년 공부한 페페는 한국어 전공이 아니지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20대 후반의 통-번역사입니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이 인도네시아에서도, 더욱 독특한 문화를 가진 서부 수마트라 미낭까바우(Mingakabau) 지역의 전통과 관례를 다루고 있어 내가 관련 문화 부분에 대한 조사를 부탁한, 당시 비서이기도 하죠. 미낭까바우는 인도네시아 부페에 버금가는 빠당 음식(Masakan Padang 또는 Masakan Minang이라고도 함)으로 유명한 지역인데 한국에도 빠당 음식점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문닫았을까요?

 

빠당 식당
빠당 음식 - 먹은 만큼만 돈을 내는 시스템입니다.

아무튼 페페가 인도네시아인이라 해서 현지 모든 문화에 통달했을 리는 없습니다. 페페의 어머니가 수마트라 남쪽 끝의 람뿡(Lampung) 사람이라 하지만 같은 수마트라라 해도 미낭까바우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곳입니다. 다행히 그 지역 출신 젊은 변호사 한 명을 잘 알고 지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관습이나 속담에 대한 도움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페페가 찾아 놓은 자료들을 참고하고 그래도 이해가 안되면 카톡을 통해 긴 대화를 하며 머리를 짜내 마침내 결과를 도출해 내곤 했습니다. 그게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 위에서 전구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사전 조사된 정보를 바닥에 깔고 책을 번역하던 3개월 동안 뭘 모르고 번역하던 앞부분과 좀 익숙해진 후 번역한 뒷부분 사이에서 위화감을 생기는 부분들은 대개 문자적으론 문제없어 보여도 분명 오역이 있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뭔가 잘못 묘사한 곳들이었어요. 퇴고를 몇 차례 하면서 수도 없이 그런 부분들에 부딪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애당초 내가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 그런데 왜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이런 가능성, 저런 개연성은 없는지 생각의 흐름에 따라 내가 쭉 이야기를 하고 페페가 인도네시아인의 감각으로 대꾸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장의 뭐가 문제였는지, 그 문화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게 어느 부분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앞뒤 맥락에 딱 들어맞는 번역문장이 완성되곤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은 하염없이 들어갔으니 아주 효율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오역방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과정에서 페페와의 협업은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이어서 이후 노동연구원의 현지진출 한국기업 고용상황 실태조사 설문용역이나 일주일 만에 500장을 번역해야 하는 번역 용역에도 매번 페페를 기용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시티 누르바야> 번역 프로젝트에도 페페가 추가 조사를 진행하는 중이고요. <시티 누르바야>도 미낭까바우 출신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입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이런 훌륭한 협업사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약점을 털어놓는 관계로까지 가진 않았습니다. 일로 만난 상대이고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아 그렇게까지 가까워지지 않기도 했지만 예전 내가 내 입장을 모두 털어놓았던 상대 중에 그 약점을 역이용해 공격해 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엇습니다.

 

오직 두 사람만이 내 약점을 역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약점을 지켜 주었는데 그 친구들이 아직까지 오랫동안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술라웨시의 골치덩이 니켈광산주 릴리와 내가 베트남에 가 있을 때 아직 일부 남아 있던 미용기기 수입판매사업을 맡겼다가 흔적도 없이 다 말아먹은 메이, 그 차차와 마르셀의 엄마입니다.

 

내 약점을 공격하진 않았지만 내 인생에 엄청난 타격을 준 친구들이죠.

 

 

 

2021.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