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실패담을 얘기하는 사람들

beautician 2021. 4. 28. 11:15

패자부활전을 위하여

 

 

 

2009년은 내가 파산의 나락에서 거의 다 빠져나왔을 시기입니다.

아이들은 2007년, 2008년에 각각 자카르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각각 싱가포르와 호주의 대학으로 진학한 상태였습니다. 연년생이어서 둘을 동시에 유학시키는 게 장난 아니었지만 당시 미용기기 수입판매가 나름 잘 돌아갔고 아내도 영어 레슨받는 학생들이 40명 정도로 거의 작은 학원 수준이었으므로 산더미 같은 빚을 갚아 가면서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도 어렵사리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내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린 게 2008년 12월 23일의 일이니 대략 그때 한숨을 돌렸던 것 같습니다.

 

초창기엔 블로그에 간단한 신변잡기를 썼지만 나중엔 처음 인도네시아에 어떻게 와서 뭘 하다가 어떻게 망하고 어떻게 고군분투했는지를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목 하나 글 하나로 딱 떨어지지 않아 아무도 찾지 않는 블로그에 본의 아니게 연재를 했는데 그 첫 시리즈가 ‘적도에 부는 바람’이란 제목이었습니다. 프롤로그를 포함해 아홉 편의 짧지 않은 글에 내가 파산해 가는 과정을 적었습니다. 그거 모으면 얇은 책이 한 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게 뭐 자랑거리라고 적느냐는 지인들도 있었는데 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자신을 따르라 말하지만 그건 한 명의 로또 당첨자를 내기 위해 복권을 산 수많은 사람들이 꽝을 맞은 것처럼 그의 성공은 실패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더미가 이룬 산 위에 만들어진 영광의 무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성공담을 듣고, 그런 이의 자서전을 읽은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함정에 빠지거나 적의 총칼에 쓰러져 인생의 길목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게 될 것이고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는데 이제 미용기기 수입판매로 조금 살아났다고 해서 성공담을 쓴다는 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난 실패담을 쓰는 게 당연했고 가능하면 내 글을 읽은 사람은 그때 내가 밟았던 그 지뢰를 밟지 않고 내가 빠졌던 그 함정을 피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글에 등장하는 나는 미숙하고 우유부단하고 찌질하기까지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내가 주식투자로 5천만 원쯤 날렸다고 얘기하면 주변 사람들은 어쩌면 좋냐고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해 주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가장 최상의 컨디션으로 잠을 자게 된다는 말은 어쩌면 진리입니다. 혹시 살다가 찔리고 베이고 부딪혀 무릎이 꺾인 채 피를 쏟고 있던 이들이 내가 똑 같은 모습으로 피를 쏟는 장면을 본다면 어쩌면 조금 위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가던 내 모습을 보면 자신도 포기하지 않을 마음이 생길지도요.

 

그런 마음으로 그 글을 다 마치고 나니 가벼워질 줄 알았던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습니다. 프롤로그는 2009년 1월에 썼지만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동안 당시의 일들이 새록새록 되살아 났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 일을 다시 겪은 것처럼 한동안 마음을 추스려야 했습니다. 과몰입했던 거죠.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던 세바시의 강사가 처절한 실패담을 얘기할 때 저 사람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라 느끼며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다 시행착오를 통해 옳은 길을 찾아가게 되는 우리들은 성공보다는 오히려 실패를 통해 더욱 성장하고 단단해지는 거라 생각합니다.

 

파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시절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있었습니다.

패자부활전.

부서지고 망가지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일으켜 세워 다시 한번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는 그런 사회.

 

난 이미 몇 번 째의 패자부활전을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토록 열망했던 대로.

 

 

2021.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