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술먹어서 개가 됐을까? 아님 원래? 본문
일과 삶의 균형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 다니던 시절엔 가정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수시로 듣곤 했습니다. 그런 헛소리를 전업작가가 된 이후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버릴 각오로 문단에 들어올 생각이 있습니까?”
빈땅 병맥주 네 병째부터 A시인이 주사를 부리기 시작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난 문학을 위해 가정을 버린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등단해 글을 쓰려면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해요.”
그는 모름지기 시인들이란 괴짜여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프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자카르타에 문인이 몇 명이나 있어요? 그 사람들 중에서도 누가 당신한테 시간 내서 이런 얘기를 해주겠어요?”
그간 대충 알고 지내던 롬복에 살던 그가 2 주일가량 자카르타에서 묵는다고 하여 한번 만나 식사하는 자리인데 가족을 버린 프로의 경험을 따르라는 소리를 거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프로는 이기적이어야 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업작가들은 다 재수없는 이기주의자들이어야 한단 말입니까?”
“잘 들어봐요. 자기 몸값을 알아서 올리는 사람이 프로인 거에요. 날 봐요. 내가 자카르타에 온 건 수금하러 온 거에요. 문협에서도 내가 필요하니까 비행기표까지 끊어주면서 모셔오는 거잖아요? 당신도 뭐 하러 그 모임 가서 머슴처럼 일해주는 거에요? 스스로 몸값을 올려야 프로란 말이오!”
“그것 참, 프로란 게 개똥 같은 거군요!”
물론 그의 오만은 주사였을 겁니다.
“내가 왜 굳이 당신을 불러내서 이런 얘기를 하겠어요?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스무고개 합니까? 그냥 얘기하세요. 당신 속마음을 왜 나한테 물어요?”
그냥 하면 될 대화를 자꾸 극적으로 몰아가려는 그의 시도가 좀 짜증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화 중에 밑도 끝도 없이 ‘사랑이 뭔지 아세요?’ ‘좋아하는 것과 사랑이 뭐가 다른지 아세요?’ ‘슬픔의 정의를 말해봐요’ 하며 치고 들어와 내가 잠시 머뭇거리면 그것 보라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시인과의 대화라는 게 참 역겨운 거라는 걸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소설가가 되는 걸 도와줄 수 있는 건 나뿐이에요. 당신을 문하생으로 받아줄 쟁쟁한 사람을 소개해 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당신을 등단시켜 주고 이끌어 줄 거에요. 그런 비용이 보통 200에서 500 정도 든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뭐, 꼭 그걸 내라는 게 아니에요. 우선 나랑 같이 한국에 날아가서 그 소설가랑 이틀쯤 막걸리 마시는 걸로 우선 인연을 맺어줄 수 있어요.”
그는 내게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가 말하는 등단의 길이란 유력한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유력한 문인의 후원을 받아 문단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두 번째 길을 제시하려는 거였고요.
“당신이 재외동포문학상 대상 받은 거 알아요. 하지만 그거 문단에선 안쳐줘요. 그리고 문학상 출신들 중 문단에 오래 남아있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후원자가 없으면 도태되는 거라고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게 무슨 개똥 같은 현실입니까? 그런 게 등단이라면 안하고 말겠소.”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입니다.
“내가 3년 드리죠. 보통 2년 드리는데 안타까우니 3년 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내가 불러서 만나는 건 이게 마지막이에요. 앞으로 3년 내에 마음이 바뀌면 그때 연락 주세요. 당신이 소설가가 되려면 날 통하지 않을 수 없어요. 싫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안된다고요.”
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됐고…… 그냥 먹던 술이나 마십시다.”
절대 등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게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게 어떤 이들에겐 자랑이 된다는 걸 그날 새삼 알았습니다.
2021.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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