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할 일은 너무 많은데

beautician 2021. 5. 3. 11:07

빡센 하루

 

 

금요일이 바쁜 하루가 될 건 미리 예견했지만 아침 일찍 예정에도 없었던 헬렌의 요청부터 조치해 주었습니다. 헬렌은 그랜맬리아 호텔(Gran Melia Hotel)의 코리언데스크 매니저인데 한인회가 발행하는 한인뉴스에 우리가 잘 모르는 인도네시아 풍습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좋은 번역사가 붙어 헬렌의 글은 꽤 잘 읽히는 흥미로운 컬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로 된 결과물을 한인뉴스가 컬럼기고자에겐 보내주지 않는지 헬렌은 매달 나한테 링크나 다운로드 파일을 요청합니다. 아침 일찍 컴퓨터에 앉아 그 일부터 처리했습니다.

 

그 다음은 콘텐츠진흥원 조사보고서 용역 입찰서류 차례입니다. 3월말-4월초의 마감들을 쳐내면서, 그 사이 작년 입찰서류를 기반해 초안을 잡아달라고 인도웹 최대표에게  부탁했는데 마감을 다 끝내고 4월 5일 아침에 초안을 어디까지 만들었냐고 물어보니 대답문자가 이렇게 왔습니다.

 

'ㅠㅠ'

 

전혀 손도 못댔다는 애기입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시작한 입찰서류 준비가 완료된 게 4월 8일 밤, 거기 일부 서류에 최대표와 말레이시아 멤버의 서명을 모두 받은 게 4월 9일 아침입니다. 마감은 4월 9일 오후 1시였고요. 서류를 몇 차례씩 검토해 이상없음을 확인하고 업체정보삭제본을 만들고, 업체정보를 삭제할 수 없는 서류들은 별도 PDF 파일로 만들어 콘텐츠진흥원에 이메일 보낸 게 오전 10시반. 아슬아슬했습니다. 

 

이번엔 법률자문계약서 번역입니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일을 봐주는 한국회사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로펌 인니지사와 법률자문계약을 맺는데 그 제안서가 영어로 온 게 문제입니다.  내내 미팅을 한국어로 했다면서 제안서를 영어로 보내는 건 무슨 경우일까요? 관례일까요? 아무튼 그걸 다 번역한 후 whatsapp으로 대표에게 보내주니 벌써 오전 11시 반. whatsapp의 다른 어카운트에 들어와 있는 비행기표를 보니 마음이 급해집니다.

 

아침에 대만회사로부터 'agreed, thanks'라는 간단한 답변이 한 줄 들어왔는데 곧바로 토요일인 내일 끈다리(Kendari)로 날아갈 비행기표가 온 겁니다. 전날  아침부터 고심하며 문구를 잡았던 내 조건을 밤 11시가 거의 다 되어 대만회사 사장에게 보냈습니다. 하던 일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내가 정식으로 합류하는 건 르바란/이둘피트리 휴가가 끝나는 시점인 5월 22일 이후로 하되 그전에 듀딜리전스(due diligence), 즉 업무 및 상황 파악부터 시작하겠다, 그리고 합류 후 3개월간은 자발적 프로베이션 기간으로 삼겠다, 그 기간 후 서로가 일하는 방식이나 시스템에 만족하면 정식계약을 하자......거기 달린 많은 조건들을 대만업체가 두말없이 승락한 겁니다. 이젠 더 이상 고민할 타이밍이 아닙니다. 결정한 일을 실행해야할 시간이죠.

 

남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정리하고 집을 나선 게 12시를 조금 넘은 시간. 먼저 메이네 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며칠 전 마감에 스트레스받아 만들기 시작한 소고기 잰 것이 와이프가 향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빵점을 주었는데 냉장고에 무한정 묵히는 대신 차차와 마르셀에게 먹이기로 한 겁니다. 그간 몇 차례 가져다 준 같은 음식을 아이들은 잘만 먹었습니다.

 

"이제 좀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힘에 부치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은데 너희들이 할 일이 뭔지는 알지?"

 

이 질문에 차차와 마르셀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도아(Doa)!" 아이들은 하나님과 별로 사이가 안좋은 나를 위해 자기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매일 시간 맞춰 숄랏기도할 때마다 아이들이 날 생각해 준다는 게 실리적으로 큰 힘이 됩니다.

 

그러고보니 아까 아침에 아버지와 잠깐 전화통화하면서 했던 말도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요즘 기도를 좀 빡세게 하신 모양이에요. 나한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튼 아버지 기도때문인 모양이니 책임지시고 좀 더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도 기도해 주시고 그 반대편에서 아이들도 기도해 주면 뭐가 되도 될 거라 생각하면서 찌까랑으로 차를 달렸습니다. 

 

찌까랑의 명랑쾌활과는 오래 전부터 식사하기로 했지만 짬을 못내고 있다가 오늘 만나기로 이미 열흘도 전에 약속을 한 상태였습니다. 늘 저녁식사로 만나면 식당 문닫을 시간을 넘길 만큼 서로 할 얘기가 많아 이번엔 낯술로 시작하기로 했던 겁니다. 오후 2시반, 찌까랑의 가효 식당에서 마주앉은 그에게 콘텐츠진흥원 입찰 얘기를 했습니다. 혹시라도 입찰에 붙으면 내가 하지 못하게 될 부분을 처리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러려고 약속잡은 건 아니었지만 마침 타이밍이 맞았습니다. 저녁 8시에 헤어질 때 그는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내 방 책상에 앉은 게 밤 10시 반. 예의 그 한국회사 대표에게 주간보고서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술라웨시에서 내내 마음에 걸릴 겁니다. 어쩌면 그가 전화를 걸어와 독촉을 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에겐 르바란 시작할 즈음에 내가 니켈광산 일을 하기로 한 얘기를 꺼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서 쓰기 시작한 인생질문 에세이. 

소소한 행복에 대해 써야 하는데 빡센 하루만 나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중에 행복했던 시간을 고르라면 차차와 마르셀과 새끼고양이들을 보살피던 시간이었을까요? 찌까랑 회동엔 메이도 참석했었고 귀가길에 데려다 주며 다시 들렀거든요. 어미를 잃은 새끼고양이들은, 그렇지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 하루를 빨리 마쳐야 하는데 내일 새벽에 공항 가려면 블루버드 택시에 픽업요청 해야 하는데 그걸 잊었네요. 정말 빡센 하루입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2021. 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