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말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 어떡하든 상대방 말꼬리를 잡아 문제 삼으려는 사람, 애당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 상대방이 하는 말에 온갖 아집을 담아 욕설로 반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만큼 소모적인 일이 없습니다. 소통의 본질은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충분히 이야기한 후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므로 애당초 상대방 얘기를 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과 아무리 오래 대화해도 그게 제대로 된 소통일 리 없습니다. 인도네시아라서 그랬을까요? 사기를 치겠다는 분명히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얘기해볼 기회가 꽤 많았는데 저 어수룩한 J사장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J사장 같이 성공했던 과거의 환상에 잠겨 있고 그래서 첫만남부터 말을 참지 못하고 온갖 자기 자랑을 하는 가운데..
벤쫑들이 사는 법 인도네시아어로 ‘벤쫑(bencong)’이란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적 취향 또는 여성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반찌(banci)라는 단어는 원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적 인간을 뜻하지만 실생활에선 벤쫑과 거의 비슷한 의미로 통한다. 성적취향이 남성을 향한 남자라 해서 모두 게이가 아니다. 거기에도 깜짝 놀랄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손목과 허리를 야릇하게 꺾으며 나긋나긋한 동작을 섞어 말하는 남성 미용사들은 벤쫑들 중에서도 뻬웡(Pewong)으로 분류되는데 남성 동성애자 중 여성 역할을 하는 이들로 아마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부류다. 동성애에 대한 반감이 개신교에 비해 덜할 리 없는 이슬람 사회에서 벤쫑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그들은 지..
권태기의 긍정적 측면 권태기란 슬럼프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뭔가 잘 안되는 시기인 거죠. 그리고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도 아닙니다. 방아쇠를 당겨야 총알이 나가는 것처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유발시키는 모종의 사건이 있은 다음 찾아옵니다. 마치 초벌번역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양승윤 교수님의 정리본을 받았을 때처럼요. 족히 한 달은 슬럼프에 빠져 제대로 번역에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일이 2018년 12월에 벌어졌습니다. 그해 초부터 한 회사의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부동산 개발회사인 그곳은 민간토지도 얼마든지 많은데 하필이면 북부 자카르타 끄마요란이란 곳 정부소유 부지에 주상복합단지를 짓겠다고 3년째 노력 중이지만 주무 부처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안유지가 중요하다면..
성과를 내는 사람들 무려 삼성전자 인도네시아 법인장과 5월 르바란 휴무 첫 날에 점심약속이 잡혔습니다. 사실 부장이나 팀장이라 해서 꼭 자기 밑에 부서나 팀을 거느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건 그냥 조직 속에서 해당 인물의 위치를 표시하는 라벨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처럼 모 대기업은 현지 발전소를 담당하는 법인장 외에도 재무담당 법인장, 자원개발담당 법인장 등 실제로 법인을 거느리진 않았지만 거의 동급의 직책이라는 꼬리표로 달아주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이번에 약속이 잡힌 친구는 대학 ROTC 동기생으로 전무를 단 지 2년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의 특성상 부장이 이사로 승진하며 임원이 되는 순간 퇴직금을 정산받고 이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 짤려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인데 ..
귀신도 못막는 사기꾼들 이태리 헤어코스메틱 브랜드 중 알파파프(Alfaparf)를 수입하는 회사와 장기간 거래했습니다. 미용브랜드들은 모델들을 동원한 화려한 시연 세미나를 통해 미용사들과 미용실 주인들에게 제품을 어필하는데 나도 스폰서 자격으로 발리나 메단(Medan) 같은 곳을 따라가 보곤 했습니다. 그 회사 에디 사장 어머니가 특이한 분이셨는데 북부 자카르타 순떠르(Sunter) 지역에 알파파프 사옥 오프닝을 할 당시 우아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 계단 뒤에 뻐눙구(penunggu) 여자 애가 하나 있는데 누굴 해치는 애는 아니니 그냥 알고들만 계세요.” 뻐눙구란 지박령을 뜻합니다. 사옥 계단 뒷편에 여자 지박령이 어른거린다는 겁니다. 화교인 사장 어머니는 두꾼과 풍수사..
출발점 전날 밤 늦게까지 이어진 미팅으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금요일 아침이지만 기어이 차를 몰고 나가야 했던 건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남부 자카르타 까르티니(Jl. R.A. Karniti) 도로변 한국인들 많이 사는 베벌리 타워 아파트에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날 아이들에게 딱 맞을 듯한 영어 소설책 20권이 중고나라에 올라와 급히 찜했는데 그걸 가지러 간 겁니다. 직접 픽업해 가라는 조건을 달아 먼 길을 온 사람에게 원 주인이 얼굴도 보이지 않고 가사도우미 시켜 책을 내려 보낸 걸 실망스러워 했던 건 요즘같이 각박한 시대에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통성명이라도 하며 인사라도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물론 그렇게 처신한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닙니다. 요즘..
할 바엔 잘해야 할까? 내 사업을 하던 당시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은 직원들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뜬금없이 원래 꼭 잘해야 할 필요 없다는 뉘앙스의 세바시 질문에 다시 맥락과 용어의 정의를 둘러보게 된다. 잘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해야 하는 일이란 과연 어떤 일들인지? 앞뒤 다 잘라 단순화시키자면 ‘잘’ 한다는 건 이전에 했던 것, 또는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성립하는 개념, 즉 비교 대상이 있어 그보다 나은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잘하고 못하는 걸 따지는 객체는 그럴 의미가 별로 없는 숨쉬고 먹고 자는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라 수치나 상장 보상 등 어떤 식으로든 성과가 표시되는 ‘과업’일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우린 모종의 과업을 예전보다, 또는 ..
인생은 장기전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만 어떤 사람이 어떤 일로 성공에 이르거나 처절한 실패에 봉착한다는 소설이나 자서전 속 이야기들은 꽤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오늘 처한 상황을 보면서 세상을 읽고 사람을 평가하려면 사건 위주로 볼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 한 조직의 역사를 통으로 봐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에 딱 맞는 글을 예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예의 그 설교시간에. 난 왕자와 공주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결혼해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 속 결론을 믿지 않습니다. 극적으로 맺어진 왕자들과 공주들도 그 후에 갈등과 고통을 겪어 성격차이나 숨겨놓은 애인 문제로 이혼하기도 하고 왕위를 찬탈당하기도 하고 전쟁에서 패해 죽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