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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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의 긍정적 측면
권태기란 슬럼프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뭔가 잘 안되는 시기인 거죠.
그리고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도 아닙니다. 방아쇠를 당겨야 총알이 나가는 것처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유발시키는 모종의 사건이 있은 다음 찾아옵니다. 마치 <막스 하벨라르> 초벌번역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양승윤 교수님의 정리본을 받았을 때처럼요. 족히 한 달은 슬럼프에 빠져 제대로 번역에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일이 2018년 12월에 벌어졌습니다.
그해 초부터 한 회사의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부동산 개발회사인 그곳은 민간토지도 얼마든지 많은데 하필이면 북부 자카르타 끄마요란이란 곳 정부소유 부지에 주상복합단지를 짓겠다고 3년째 노력 중이지만 주무 부처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안유지가 중요하다면서도 J사장은 워낙 말이 많아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런 상황을 푸념하다보니 수많은 사기꾼들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꼬드겨 돈을 뜯어갔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죠.
그러다가 삼성 출신 친구를 통해 대통령 친인척 관리를 지원한다는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대개 호텔에서 미팅을 할 때마다 그 앞뒤로 민간인인 그를 만나러 온 국회의원들, 국영업체 사장들이 줄을 서있었습니다. J사장이 3년 동안 부통령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을 안다는 사람들에게 돈을 뜯기면서도 문전을 서성였던 것에 반해 그 브로커는 착수 한 달 만에 우릴 대통령궁 옆 국가사무처 건물에서 국무장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2018년 12월은 2019년 4월에 있을 대선을 앞둔 시점. 하필 그날 국무장관은 대통령 호출이 있어 차관급인 사무처 사무국장 스티아 우타마(Setya Utama)란 사람이 대신 나와 PT를 듣고 코멘트를 해주었습니다. 정부 소유 토지관련 사안이니 국영기업과 조인트벤쳐를 만들어 오라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J사장은 이 대목에서 예상치도 않았던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국무장관이 나와야 하는데 사무국장이 나왔으니 이 프레젠테이션 미팅은 사기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함께 PT에 참석한 한국측 컨소시엄 기업들에겐 대성공이라 차축하면서도 나를 향해서만은 그렇게 말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는데 아마 돈 문제 때문에 저러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회사 자금에 대한 전권을 쥐고자 했으므로 누군가와 조인트벤쳐 맺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으니 사무국장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브로커에겐 이 PT를 성사시켜 주면 20만 불을 주겠다고 공언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과분한 금액이었는데 누구도 뚫지 못한 국가사무처의 문을 열고 프레젠테이션까지 가능케 한다면 그 정도 충분히 지불하겠다는 것이 아마도 그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까지는요. 하지만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국무부 PT가 끝나자마자 그는 브로커와 내 삼성 친구를 사기꾼으로 몰았습니다. 물론 돈을 주지 않으려는 수작이었습니다.
그 국가사무처 PT 이후 2년 반이 지났지만 J사장은 이후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뒤로 후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10명 정도 다른 브로커들을 사용했지만 아무도 국가사무처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삼성 친구와 그 브로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J사장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오히려 사기꾼이라 비난받으며 약속한 수고비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 그날 이후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난 그후 1년 2개월을 더 J사장의 일을 도왔지만 그 마음이 이전 같을 수 없었습니다. 진심과 최선을 다한 후 나 역시 싸잡혀 사기단 일원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그제야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J사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고 더 이상 그를 위해 진심과 최선을 다할 필요 없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2020년 2월 말 그와의 관계가 청산되고 그 회사 명함을 모두 찢어버렸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또 다른 사기꾼들에게 홀려 다니다가 결국 탈탈 털린 후 그해 9월경 돈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엉망진창으로 팽개쳐 놓은 차량, 주택, 채무 등 나머지 문제들을 더 이상 관계없어야 할 내가 나서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며 가장 힘없는, 하지만 J사장을 믿고 이런 저런 보증서류에 서명한 그의 운전사와 가정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다시 일을 돕기 시작한 것도 그 J사장입니다. 그는 1월에 돌아와 나를 집요하게 찾아다녔습니다. 그의 돈을 맡아 놓고서도 그가 한국으로 도망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의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을 때 발벗고 나서 문제를 풀어준 게 나 혼자였고 지난 4년 넘는 기간 동안 그를 국무부까지 데려간 건 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2018년 12월 PT가 사기였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쉰소리에 질린 나는 월급 선불과 재택근무 비상근 조건을 달았습니다.
최근 국회의 유력인사가 직접 나서 상당한 보상약속을 담보로 각 관련부처 장관들에게 직접 로비를 한 결과 지난 4월 23일(금) 국가사무처, 국토개발부, 재무부, 경제조정장관실 등 각 부처들이 투자조정청 주최 줌미팅에 참석했고 거기서 난 한 번 더 PT를 했습니다. 그런데 국가 사무처에서 나온 사람은 2018년의 그 스티아 우타마 사무국장이었습니다. 조코위 2기 정부가 시작된 후에도 쁘라띡노 국회사무처 장관은 물론 그의 오른팔 사무국장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가 OK하면 모든 게 순조로울 수 있고 그가 NO 하면 다른 부처들이 아무리 종용해도 일은 성사될 수 없는 게 자명했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힘있는 사람이었어요?”
J사장의 말에 난 쓴웃음을 흘렸습니다. 그는 그제야 스티아 우타마가 그의 프로젝트 성사를 위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란 걸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2년 반 전, 그는 국가사무처 PT 자체가 사기라고 목청을 돋우며 결국 당시 사무국장 요구에 아무런 팔로업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기회를 발로 걷어찼던 것입니다.
“저 사람들한테 PT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가 이 발언을 했을 때 난 이제 매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그 때 아무런 팔로업도 없이 종적을 감췄던 그 회사라는 걸 사무국장이 기억해 냈으니 말입니다. 다른 모든 부처들이 사전에 로비한 대로 우호적인 발언을 쏟아 냈지만 예상대로 국회사무처 사무국장은 긍정적인 약속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대신 우리가 충족시켜야 할 여러가지 조건들을 나열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난 스트레스 받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가 성사되어야 대박나는 건 내가 아니라 J사장이니까요. 현재 브로커 실무진들이 마치 맡겨놓기라도 한 듯 매번 몇만 불씩 활동비를 달라 해도 별 고민없이 단칼에 거절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 돈 안주면 프로젝트 따주기 힘들다는 협박이 나한테는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 되든 말든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오. 된다고 내 월급이 한 푼이라도 오를 것 같소? 안되면 그만이지. 이게 안돼서 곤란해지는 건 J사장이랑 성공사례금 받아야 할 당신들 아니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날 협박해?”
한번 벽에 부딪혀 실패를 맛보고 나면 스스로 추스르면서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 순간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권태기니 슬럼프 같은 부정적인 단어로 묘사되는 것뿐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철저히 깨지는 순간은 자신과 상황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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