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성패는 과정 설계와 투입된 시간의 절대치에

beautician 2021. 5. 24. 13:08

할 바엔 잘해야 할까?

 

 

내 사업을 하던 당시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은 직원들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뜬금없이 원래 꼭 잘해야 할 필요 없다는 뉘앙스의 세바시 질문에 다시 맥락과 용어의 정의를 둘러보게 된다. 잘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해야 하는 일이란 과연 어떤 일들인지?

 

앞뒤 다 잘라 단순화시키자면 ‘잘’ 한다는 건 이전에 했던 것, 또는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성립하는 개념, 즉 비교 대상이 있어 그보다 나은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잘하고 못하는 걸 따지는 객체는 그럴 의미가 별로 없는 숨쉬고 먹고 자는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라 수치나 상장 보상 등 어떤 식으로든 성과가 표시되는 ‘과업’일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우린 모종의 과업을 예전보다, 또는 남들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1. 못하거나 안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할 바에 잘하는 게 맞다.

2. 우선 내 역량과 시간을 생각해 본다. 최대한 배당할 수 있는 시간을 활용하면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

3.그런 다음 목표치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계획이란 거창한 사업계획일 수도 있고 만화를 그리거나 영화, 광고를 찍기 위한 콘티작업일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엔 그 목표까지 가기 위해 딛고 건널 징검다리 몇 개를 어디에 놓을까 생각해 보는 과정이다.

4. 그런 다음 준비작업. 예컨대 어떤 사안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면 관련 취재나 검색, 취합 등의 일을 해 두는 것이다.

5. 그런 다음 실행.

 

물론 여기서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잘하려는 텐션보다 충실하게 과정을 충족시켜 나가면 필연적으로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이란 믿음이라 생각한다.

 

석 달 전쯤 ‘신문과방송’이란 매체의 원고의뢰를 받았다. 언론을 주목하고 연구하여 상황을 소개하는 매체인데 해외언론들에 대해서는 주로 영미 선진국 박사과정에 있는 기고자들이 각종 연구논문과 수치들을 기반으로 200자 원고지 30매 정도의 글을 싣는다. 원래 한국일보 특파원에게 왔던 의뢰를 토스받은 것이다.

 

1. 일단 안해야 할 이유는 없다. 특히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어차피 매일 신문 스크랩을 하는 입장에서 못할 일은 아닌 듯하다.

2. 마감 두 달 전에 원고의뢰를 받았으니 시간은 비교적 충분하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처럼 관련 통게자료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이 나라 언론을 어떤 식으로 평가해 글을 써야 하나?

3. 일단 두세 가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을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추이를 조사해 써 보기로 했다. 마침 여군병사가 군사령관 지원으로 수술받아 남성이 된 사건이 있었고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할랄 논란이 벌어지던 중이었다.

4. 그런데 그렇게 모은 자료가 ‘인도네시아 언론의 오늘’을 보여주기엔 방향성도 시사성도 부족하다. 기사가 아니라 사설을 모아 봐야 하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막판 생난리……

5. 마감날 새벽에 원고 시작. 간신히 완성, 송고.

 

딱히 잘한 것 같진 않지만 최선을 다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뭔가 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다짐이나 약속은 별 의미가 없다. 일의 함량을 결정하는 것은 잘 디자인된 과정, 즉 시스템과 거기 투여되는 시간의 절대량이라 생각한다.

 

내가 중국어 공부에 애를 먹는 건 오가는 차량 속에서 유튜브 틀어 놓는 것만으로 이미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맞지만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까지 갈 과정의 디자인이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다.

 

 

2021.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