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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화교 두꾼 vs 보이스피싱범

beautician 2021. 5. 26. 11:09

귀신도 못막는 사기꾼들

 

뻐눙구(Penunggu)

 

이태리 헤어코스메틱 브랜드 중 알파파프(Alfaparf)를 수입하는 회사와 장기간 거래했습니다. 미용브랜드들은 모델들을 동원한 화려한 시연 세미나를 통해 미용사들과 미용실 주인들에게 제품을 어필하는데 나도 스폰서 자격으로 발리나 메단(Medan) 같은 곳을 따라가 보곤 했습니다.

 

그 회사 에디 사장 어머니가 특이한 분이셨는데 북부 자카르타 순떠르(Sunter) 지역에 알파파프 사옥 오프닝을 할 당시 우아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 계단 뒤에 뻐눙구(penunggu) 여자 애가 하나 있는데 누굴 해치는 애는 아니니 그냥 알고들만 계세요.”

 

뻐눙구란 지박령을 뜻합니다. 사옥 계단 뒷편에 여자 지박령이 어른거린다는 겁니다. 화교인 사장 어머니는 두꾼과 풍수사 사이 어딘가쯤에 자리매김한 사람입니다. 귀신을 본다고 하는데 에디 사장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화교들 중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 건 풍수에 대한 중국인들의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겠죠. 서부 자카르타 라뚜멘텐(Ratumenten)이란 거리의 오래된 재래시장 건물에 쿠리어 회사 사무실을 냈던 한 화교 친구는 굳이 그 건물의 다른 쪽으로 사무실을 바꾸려 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코 앞에 육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교 바로 앞이니 편하지 않겠냐 물었더니 풍수 상 뭔가 긴 것이 가리키는 형상을 한 곳에는 악령들이 꼬인다는 거에요. 그래서 육교가 가리키는 위치의 당시 사무실을 손해를 무릅쓰고 기어이 건물 반대쪽으로 옮기더군요.

 

어느 날 그 알파파프 에디 사장이 어머니에게 일이 생겼다며 그날 약속을 급히 취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엔 절대 약속을 변경하지 않는 친구여서 며칠 후 물어보았더니 어머니가 그날 오전에 둘째 아들(에디 사장은 장남입니다)이 사고를 내고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급히 돈을 질러 피해자와 합의하지 않으면 상당한 기간의 징역형을 받게 될 거란 전화를 받았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홀린 듯 자기 통장에서 적지 않은 돈을 송금해 준 후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둘째 아들이 늦잠을 자고서 자기 방에서 나오다가 어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귀신도 좌지우지하던 어머니는 그제서야 자기가 보이스피싱 또는 최면술에 사기를 당했다는 걸 깨닫고 망연자실 무너졌고 그 소식을 들은 에디 사장이 급히 집으로 달려가 상황을 수습했다고 합니다.

 

그런 보이스피싱, 문자사기 시도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자칫 클릭하면 랩톱에 악성코드를 흩뿌리는 이메일도 한 달이면 족히 10여 통은 들어옵니다. 남다른 감각을 가진 에디 사장의 어머니조차 넘어가 버리고 마는 보이스피싱은 때로는 야릇한 전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용도가 없어져 끊어버리고 만 일반전화를 아직 사용하던 시절, 종종 잘못 걸려온 전화가 울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잘못 걸었다는 걸 분명히 알고 난 상대방이 이렇게 물어보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럼 전화 받으신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은 사람의 인적상황을 파악하는 건 일반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은행이나 카드사, 대출회사 등에서 명단을 확보하여 사기전화를 거는 게 보통이지만 그런 식으로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상대방 기본정보를 빼내는 보이스피싱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백이면 백 보이스피싱에 당하고 말 것만 같은 어수룩한 메이는 두 번씩이나 보이스피싱에 넘어갔지만, 역설적으로 완전히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피해를 모면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차차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차차가 학교에 간 시간에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 선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차차가 학교건물 3층 난간에서 밑으로 떨어져 생명이 위독한 상태라 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차차는 메이에겐 자기 생명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전화를 건 사람은 수술을 급히 하려면 보증금을 걸어야 하니 어느 구좌로 얼마를 보내야 한다고 말하려는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수화기 저편의 메이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차차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순간 집을 박차고 뛰어나가 엉엉 울면서 학교로 달려가고 있었던 겁니다.

 

미친 사람 몰골이 되어 학교에 도착한 메이가 건강한 차차를 만나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건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메이의 특이한 점은 1년 후 똑 같은 내용의 보이스피싱을 당하고서 똑같이 엉엉 울며 학교로 내달렸다는 겁니다. 보이스피싱범은 이번에도 구좌번호를 불러줄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

 

“육상선수야? 나한테라도 전화했어야지?”

“머리 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안났어요……”

 

보이스피싱에 바보라서 당하고 똑똑해서 피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편 피싱범들은 쉬워 보였던 메이에게 연속 두 번 실패하면서 자신감에 좀 상처를 입었을까요?

 

 

 

2021.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