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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실컷 이용해 얻어낸 성공 본문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남을 실컷 이용해 얻어낸 성공

beautician 2021. 5. 27. 12:22

성과를 내는 사람들

 

 

무려 삼성전자 인도네시아 법인장과 5월 르바란 휴무 첫 날에 점심약속이 잡혔습니다.

사실 부장이나 팀장이라 해서 꼭 자기 밑에 부서나 팀을 거느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건 그냥 조직 속에서 해당 인물의 위치를 표시하는 라벨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처럼 모 대기업은 현지 발전소를 담당하는 법인장 외에도 재무담당 법인장, 자원개발담당 법인장 등 실제로 법인을 거느리진 않았지만 거의 동급의 직책이라는 꼬리표로 달아주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이번에 약속이 잡힌 친구는 대학 ROTC 동기생으로 전무를 단 지 2년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의 특성상 부장이 이사로 승진하며 임원이 되는 순간 퇴직금을 정산받고 이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 짤려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인데 그 대단한 조직에서 잘 버티며 ‘판매법인장’의 직책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승진을 거듭한 그는 전무로 된 후 곧바로 돌아갔어야 할 본사에 코로나로 귀임이 1년 늦어진 것입니다. 따로 약속을 잡으려 해도 여의치 않던 그 친구가 먼저 식사를 제의한 것은 본사 복귀가 임박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지난 몇 해 사이 군과 사회 거대조직의 정점 가까이 가 있던 동기들이 줄지어 퇴역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역시 곧 지난 30여년과는 사뭇 다를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문턱에 서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합니다. 그는 그간 어떻게 성공을 일구어 왔을까요?

 

상대방을 오직 자기 성공을 위한 도구로 보던 사람들을 그동안 수도 없이 만났고 지금도 주변에 얼마든지 넘쳐납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을 잘 생각해 보면 우선 처음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축합니다. 그런 다음엔 이런 저런 약속들을 마구 남발하는데 거의 대부분 지키기 어려운 것들이고 사실 잘 지키지도 않습니다. 그런 다음 사소한 부탁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걸로 간을 보는 거죠. 그 부탁을 들어주고 나면 부탁의 규모와 강도가 점점 선을 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망간원석 무역업을 하겠다고 들어왔던 최사장은 직원 채용면접을 할 때마다 일이 잘 되면 집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남발했습니다. 물론 한 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채용한 직원들에게 무리한 일을 요구하면서 ‘내가 너 집까지 사줄 마음을 먹었는데 넌 이런 것도 못해줘?’라는 기조로 몰아세우곤 했습니다. 실제로 자신은 지킬 생각도 없는 말을 던져 놓고서 상대방에겐 이미 집을 사주기라도 한 듯 그 보상을 요구했던 것이죠.

 

얼마 전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던 대만업체에게도 그런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라마단 금식월과 르바란 연휴가 지날 때까지 일단 상황파악을 한 후 5월 말에 조인하는 조건에 합의했는데 내 조건의 기본은 광산주인 릴리와 그 대만업체 사이의 ‘협력관계’ 속에서 내 친구 릴리의 이해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죠. 고용계약서 초안을 달라는 요청에 대만업체는 흔쾌히 그러리라 답했지만 이후 열흘이 지나도 계약서 초안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릴리에게 이런 저런 양보를 서면으로 받아달라는 요구가 줄지었습니다. 그 상황을 조율하면서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업무파악 기간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단시간 내에 릴리가 신뢰하는 나를 지렛대로 릴리의 양보를 받아내 사업적 이익을 얻겠다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보를 얻어낸 후엔 내 한계효용도 사라지는 것이고요. 얄팍한 작전이긴 하지만 사실 기업들은 어디나 최소한 그 정도의 탐욕과 야비함은 기본으로 깔고 갑니다. 그래서 니켈 광산에 합류할지 문제는 이제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 겪으면서 혹시 나는 누군가를 내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 적은 없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동업하려 했던 것도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 시도였을까요?

 

베트남에서 1년 3개월을 지내면서 사실 호치민의 친구는 나한테 필요한 것을 이미 얻은 상태였습니다. 말하자면 내 한계효용이 사라진 것인데 난 해달라는 걸 다해 주었으니 이젠 그가 내 요구사항을 조치해 줄 순서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약속은 깨졌고 난 환멸을 가득 안은 채 자카르타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6년이 지난 후 그가 다시 연락해 왔을 때 옛날 일은 다 묻어둘 생각이었는데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습니다. 다단계 사업에 손을 대고 있던 그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고 싶었는데 마침 자카르타에 자기가 아는 만만한 호구가 한 명 떠올랐던 거죠. 근황을 서로 얘기한 첫 번째 통화가 끝난 후 며칠 후 두 번째 통화부터 그는 집요하게 그 다단계 조직에 자기 밑으로 들어와 달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게 나한테 크게 손해날 일도 아니었기에 수락했는데 그게 그로서는 간을 본 것이었어요. 그는 내가 여전히 만만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며칠 후 그는 다짜고짜 한 웹사이트 링크를 보내주면서 이런 멘션을 달았습니다.

 

“형님, 이것 좀 번역해 주세요.”

 

그건 그 다단계업체의 한국 웹사이트였습니다. 사이트맵으로 보아도 50페이지는 족히 넘을 분량을 그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온 겁니다. 옛날 어수룩하던 시절처럼 내가 공짜로 해준다면 개이득인 거고 내가 해주지 않는다 해도 그로서는  본전인 거죠. 6년 전과 다름없이 모든 상대방을 도구처럼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는 그를 보며 2014년 이전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2백만원쯤 들겠는데. 송금할 구좌 알려줄까?”

 

이렇게 답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일주일 넘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언제 또 다시 천연덕스럽게 연락해 올 지도 모릅니다.

 

성과가 없는 일은 누구도 하고 싶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짓밟고 희생시키면서 얻는 성과라면 참 곤란한 일입니다. 그래서 난 크게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에 접었습니다.

 

 

 

2021.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