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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건강한 소통을 위하여

beautician 2021. 5. 30. 11:30

말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

 

 

어떡하든 상대방 말꼬리를 잡아 문제 삼으려는 사람, 애당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 상대방이 하는 말에 온갖 아집을 담아 욕설로 반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만큼 소모적인 일이 없습니다. 소통의 본질은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충분히 이야기한 후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므로 애당초 상대방 얘기를 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과 아무리 오래 대화해도 그게 제대로 된 소통일 리 없습니다.

 

인도네시아라서 그랬을까요? 사기를 치겠다는 분명히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얘기해볼 기회가 꽤 많았는데 저 어수룩한 J사장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J사장 같이 성공했던 과거의 환상에 잠겨 있고 그래서 첫만남부터 말을 참지 못하고 온갖 자기 자랑을 하는 가운데 특히 돈자랑을 하는 부류는 아주 만만한 먹잇감인 겁니다. 그는 국가사무처에 줄을 대기 위해 대충 20군데쯤 되는 브로커들을 순차적으로 사용했는데 그들이 모두 사기를 치려고 온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거의 대부분 J사장에게 돈만 뜯고 끝났습니다.

 

아무튼 사기꾼들의 거짓말이 인도네시아 온지 얼마되지 않은 J사장에겐 쉽게 통했는데 그들이 미팅인원을 제한하며 내가 통역으로 따라나서는 걸 배제한 건 인도네시아 말이 되고 현지 경험을 오래 한 사람 앞에서 신참을 대놓고 등쳐 먹는 게 쉽지 않았서였을 겁니다. 그래서 J사장도 그들에게 한 달쯤 놀아나다가 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들면 나를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사용한 측면도 있습니다.

 

물론 내가 사람들에게 사기꾼 라벨 붙이기를 즐기는 건 아닙니다. 인도네시아 교민사회엔 사기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은 대개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선수금 받고 일을 시작했지만 닥쳐보니 능력도 여건도 되지 않아 결국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받은 선수금도 돌려주지 못한 경우입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기를 친 꼴이 되고 만 것이죠. 비난받을 만한 상황인 건 맞지만 진성 사기꾼이라 하기엔 2% 부족합니다.

 

두 번째 경우는 상대방이 요청받은 과업을 완수했지만 그게 발주한 사람 마음에 차지 않은 경우입니다. 짜장면을 시켜 짜장면이 왔지만 원래 짬뽕을 시키려 했다가 말이 잘못 나왔을 뿐인데 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정말로 짜장면을 가져왔냐는 것이죠. 또는 시킨 굴짬뽕에 한국산 굴이 아니라 일본산 굴을 써야 했다며 식탁을 뒤집어 엎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어딘가 뒤틀린 발주자가 부지런히 온동네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명백히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사기꾼이란 굴레를 씌우는 겁니다.

 

2018년 12월에 국회사무처 프레젠테이션을 가능하게 해준 브로커가 사기꾼으로 몰린 건 위의 두 번째 경우입니다. 이런 게 교민사회에서 소위 사기꾼이라 불리는 이들의 9할이 넘을 거라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성 사기꾼’들도 분명 있습니다.

 

전 정권의 법무장관을 지냈고 유명한 로펌을 운영하는 Y변호사를 잘 안다며 접근한 두 명의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50대 초반쯤 젊은 쪽 C는 내가 나온 대학교 같은 과후배라고 들었는데 내 소개도 전해 들었을 그가 내 앞에서 모교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이력도 거짓말이지 싶습니다. 그는 Y변호사 자택에 여러 번 불려갔고 자기 앞에서 대통령에게 전화해 J사장 프로젝트를 구두로 허가 받는 모습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난 그게 이상했어요. 그는 인도네시아에 꽤 오래 살았지만 인니어 실력은 상담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어요. Y변호사가 대통령과 영어로 통화했던 걸까요?

 

마침 시기가 라마단이어서 Y변호사가 J사장을 부까뿌아사 행사에 초대했습니다. 금식월 중 무슬림들은 매일 해가 지면 금식을 깨고 음식물을 취하는 부까뿌아사 행사를 갖지만 그날은 그가 가족 친지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한 날이었어요. 우린 그 행사에 빌붙은 겁니다. 예의 그 두 한국인은 내가 가는 걸 극구 반대했지만 J사장이 기어이 날 참석하도록 한 건 아마 그도 확신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웃기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몇 번이나 그 집에 초청받았다는 그 두 사람이 J사장과 차 한 대로 함께 출발했다가 그 집을 찾지 못해 붐비는 파트마와티 거리를 몇 번씩이나 왕복했으므로 결국 먼저 도착한 내가 길가에 나가 손을 흔들어줘야 했습니다. 부까뿌아사 행사 중 두 한국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쭈뼛거리는 것도 너무 이상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오래 산 사람들이 비록 무슬림이 아니라 해도 부까뿌아사에 참석하는 게 새삼스러울 리 없는 거였습니다. 그들이 J사장을 Y변호사에게 소개하는 모습도 저 사람들이 과연 Y변호사와 사전에 안면을 튼 사람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날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오는 사이 두 사람은 황급히 그날 만남을 마치고 J사장과 함께 Y변호사 집을 나섰는데 그들이 먼저 간 걸 알고 뒤따라 나가는 내 앞에 그 50대 초반 한국인 C가 J사장과 함께 나갔다가 슬그머니 혼자 돌아온 게 보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명함을 꺼내 Y변호사에게 건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처음 만난 겁니다.

 

또 한 번은 모든 조율이 다 되었으니 Y변호사 사무실에서 200만불짜리 자문계약서를 정식으로 맺자며 계약선수금 25만불을 자기들이 내겠다고 했습니다. 2만불이면 떡을 칠 법률자문계약서를 2백만불로 맺는 건 분명 과했지만 그게 형식만 그럴 뿐 실제로는 J사장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면 받을 성공보수를 정상적인 형태로 받기 위한 방편이란 설명이었습니다. 계약서 초안을 보니 계약시 25만불, 1차 법률소견서 받으면 75만불, 2차 법률소견서 나오면 100만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간은 대략 2개월. 두 한국인들은 그게 두 달 내에 프로젝트를 따준다는 뜻이라며 J사장을 등 떠밀었습니다. 난 J사장 귀에 속삭였죠.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사깁니다.”

 

하지만 사기라면 저 사람들이 25만불을 내줄 이유가 없지 않냐며 J사장은 오히려 그 두 사람을 두둔했습니다. 그리고 계약 당일 25만불을 가져오기로 한 두 사람 중 나이 많은 60대 N이 Y변호사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그 건물 로비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다급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내가 결국 돈을 못구했네. 하지만 돈을 대줄 사람을 데려왔으니 동생은 여기 서명만 하면 돼.” J사장은 어느 새 그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책임지고 내주겠다던 계약금 25만불을 J사장에게 당장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빌리라며 돈 빌려줄 사람까지 대동하고 나타났던 겁니다.

 

하지만 그 돈 빌려주겠다는 사람도 한 통속이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 후보였는지 이렇게 말하더군요. “돈을 현금으로 찾아왔지만 돈가방을 와이프가 가지고 있어요. 나도 무슨 일인지 들어봐야 알겠으니 일단 변호사 미팅에 같이 갑시다. 그런 다음에 돈을 빌리든 말든 하죠.” 두 한국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왜 이렇게 된 거요?’ 하며 서로를 책망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우린 그가 찾아 놓았다는 25만불을 결국 보지도 못했는데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선수였는지도 모릅니다.

 

법률사무소에서 다시 만난 Y변호사는 그 초안을 처음 보는 눈치였습니다. 평소 받을 자문료의 100배를 주겠다고 온 사람들이 반갑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래는 그날 계약과 함께 25만불을 주는 것이었는데 그런 뒷거래를 조율한 게 틀림없어 보이는 Y변호사 조카라는 사무장이 두 한국인에게 자꾸 눈치를 주는 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난 못본 척했어요. 어차피 그날 계약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다음날 C가 실무협의를 하자며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J사장은 그들 중 나이 많은 쪽 N을 만난다며 외출한 상태였습니다. 그날 이후 두 한국인들 사이에 모종의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날 C와 30분쯤 얘기하며 이 사람이 정말 사기꾼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사기꾼으로 몰리지 않을 사람이란 걸 실감했습니다.

 

보통은 어떤 사안을 두고 얘기할 때 양쪽은 각자 애당초의 입장이 있고 그걸 토로하고 조율하는 것이 미팅, 소통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C와 얘기하면서 느낀 건 상대방이 라텍스처럼 누르면 누르는 데로 들어간다는 거였어요. 그날 난 전날 Y변호사와 계약미팅 갔던 것 관련해 확인해야 할 체크포인트를 만들어 미팅에 임했는데 그게 C에게 편했을 리 없습니다. 그 계약이 사기였다면 그는 네가 만든 체크포인트 중 어느 항목에도 대답할 수 없을 터였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놀라울 정도로 유려하고 부드럽게 모든 질문과 공격을 피해 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겐 자기 입장이란 게 없고 오직 내가 얘기하는 것에 맞춰 임기응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러니 누르면 누르는 데로 들어가는 거죠. 미팅 막판에 그는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정무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미팅에 나오면 안되는 거였어요!” 난 정무적 판단을 하려고 J사장 일을 돕는 게 아닙니다. “정치가세요?”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었습니다.

 

그 미팅 후 J사장에겐 내가 파악한 대로의 내용을 미팅보고서로 직성헤 보냈습니다. C의 말은 일관성도 없고 결국 미팅을 깨고 나갔다. 내가 판단하기에 저 사람은 사기꾼에 가깝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J사장이 그 보고서를 C에게 보낸 겁니다. C가 나한테 욕을 해와서 안게 아니라 J사장이 대놓고 나한테 그렇다고 말한 겁니다.

 

“내 입장에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봐야 하잖아요?”

 

물론 그의 입장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배이사가 너 사기꾼이라는데 너 사기꾼 맞아?’ 이런 초등학생 짓을 한 것이고 자기를 위해 일한 내 입장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었던 겁니다. 전장에서 자기만은 꼭 살아남겠다며 소대원들을 총알받이로 앞세우는 비열한 소대장처럼 말이죠. 당연히 C는 이후 나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현장에서 ‘건강한 소통’을 얘기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입니다.

 

 

2021.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