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선하게 생겼다며 칭찬하는 사람들 본문
나 자신과의 소통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선하게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선하다, 착하다는 말이 나쁜 말일 리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착한 사람이 되라고 배워왔고 사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일에 약간의 진심과 선의를 담고, 필요하다면 자기희생을 조금 더해 주면 누구나 듣게 될 찬사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말이 너무나 듣기 싫어졌습니다.
최근 10~20년 사이에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위해 나에게 장기적인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건 대개 채용이나 계약의 형태였고요. 그들이 내가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마운 감정이 들고 선하다 착하다는 찬사를 입에 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 다음부터 이런 메커니즘이 돌아갑니다.
1000원을 줘야 할 일을 100원을 받고 해주면 처음엔 고맙지만 일을 시킨 사람 입장에서는 이제 내가 1000원짜리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일이 100원짜리 일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1000원짜리 일들을 잔뜩 들고 와 내게 던지며 왜 100원에 해주지 않느냐고 요구하며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황을 전문용어로 ‘호구잡혔다’고 합니다.
사실 그래서 우린 이 세상에 겸손하고 착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적냐고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호구잡혀 살다가 이제 마침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 깨닫고 지독한 인간이 되기 위해 비열함과 무책임함을 주섬주섬 장착하기 시작했을 뿐이니까요.
지난 주 서로 조건을 맞춘 후 함께 끈다리로 날아갔던 대만 광물회사 사장이 지난 토요일 끈다리에서 저녁 미팅을 하며 자기네 매니저들 앞에서 나를 두고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I hope you guys also know that this Mr. Bae is a real gentleman.”
그 대목에서 토 나올 뻔했습니다. 나를 젠틀맨이라 하는 것은 내가 그 사이 나도 모르게 진심과 선의를 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희생도 조금 했거나 앞으로 곧 할 것 같은 기미를 보였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그 말은 다 함께 이 인간을 호구 잡자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돌아가 앞뒤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잘 변하지 않듯 나 역시 이번에도 방심하고 독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겁니다. 이 세상은 야생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고 어금니를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만져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던 겁니다. 그러고 나니 주말 출장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 모두 아구가 딱딱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릴리와 얘기하면서 그들이 내게 약속한 것과 전혀 다른 얘기를 릴리와 했던 것도 확인했고요. 그 결과 읽어낸 그들의 의지는 딱 한 줄이었어요.
잠시 뽑아 먹고 버리겠다!
사실 변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겐 크게 실망하지만 그런 상황인식엔 그리 실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기업들은 대략 저 정도의 이기심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으니까요. 단지 그게 노골적이냐 아니냐, 기만적이냐 아니냐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뭔가 구체적인 조치를 하거나 자카르타에서 하던 일들을 정리하기 전, 지난 주말출장을 통해 어느 지점에서부터 어떤 방향으로 협의를 시작해야 할지, 그리고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분명해졌으니 그건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일입니다. 기름진 혀에서 번지르르 나오는 감미로운 말보다 현장에서 느껴지는 행간의 진실은 왜 우리가 애써 돈 들여 가며 출장을 다니는지를 웅변처럼 알려줍니다.
나란 존재는 상대방 못지 않게 말 몇 마디로 간단히 바꿀 수 있는 그런 개체가 아닙니다.
그러니 소통을 통해 뭔가 바꾸려 하는 것보다는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인정하는 것이 그 다음 단계로 나가기 전 선결문제입니다.
난 그게 호구 문제고요.
202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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