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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바딱족 자매 이야기

beautician 2021. 5. 13. 11:17

일상다반사

 

 

왼쪽부터 메이, 차차, 아르니(메이네 아이들 어릴 때 보모) 그리고 스텔라, 메이 여동생 결혼식날.  

 

스텔라와 스테피라는 자매를 10년 전쯤에 알았다.

수마트라 북부 메단(Medan) 출신 부모를 둔 바딱(Batak)족 아이들인데 부모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엄마 쪽 친척이 운영하는 꼬스(Kost)에 살고 있었다. 꼬스는 자취방 비슷한 곳이다. 아버지가 먼저 죽고 엄마도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쪽 친척이 양육권을 받아 메단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이들은 그 집을 도망쳐 나와 자카르타까지 그 먼 길을 돌아왔다. 메단에서 학대가 심했던 거라도 짐작할 뿐이다. 돈도 없이 천 킬로미터도 훨씬 넘는 거리를, 그것도 수마트라와 자바 사이의 해협까지 건너온 아이들은 완전히 거지 꼴이 되어 엄마 쪽 친척 꼬스 앞에 도착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아 아이들은 문 밖 길가에서 그날 밤을 지샜다. 그게 스텔라가 13, 스테피가 7살 전후일 때였다.

 

동네사람들이 꼬스 여주인에게 핀잔을 주고 비난하자 결국 그녀는 자기 조카들을 꼬스 안으로 들였지만 공짜가 아니었다. “나도 여기 생계가 걸렸으니 이 방을 공짜로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카들이니 방값을 반만 받을게. 어리다고 공짜는 없어. 그게 싫으면 메단으로 돌아가든지.”

 

13살짜리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서민들, 빈민들이 모여 사는 중부 자카르타 센띠옹(Sentiong) 지역의 까위까위(Kawi-Kawi) 골목에서 스텔라는 그들 자매를 불쌍히 여긴 이웃들의 집에서 빨래를 해주거나 부엌일을 돕고 때로는 시장을 대신 봐주고 받는 심부름값으로 방값을 냈다. 밥 때가 되면 이웃들이 자매를 불러 함께 식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착한 이웃들은 무슬림이 태반이었지만 이들 바딱족 자매가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그렇게 자매를 돌보는 이웃들 중엔 차차와 마르셀의 할머니인 티티 아줌마도 있었다.

 

스텔라가 15살 되었을 때 1,500만 루피아, 우리 돈으로 120만원쯤 되는 돈을 제안하며 스텔라의 처녀성을 사겠다는 아버지 쪽 친척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메이에게 전해 들으면서 나도 스텔라와 스테피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새어나왔다. “아직도……, 그런 개새들이 있어?”

 

하지만 외국인이라고 누군가를 돕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 돈을 쥐어 주는 것으로 나는 스스로 옳은 일을 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겠지만 스텔라는 그 돈이 떨어지면 또 다시 같은 상황에 내몰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안들었다면 몰라도 이제 그런 부당한 거래제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15살짜리 여자아이를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이놈의 오지랖……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루디 하디수와르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당대 제일 유명한 미용사로 100개 넘는 프랜차이즈 아울렛과 여러 헤어코스매틱 브랜드도 가지고 있었다. 상당수 성공한 화교 미용사들이 그렇듯 그도 게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의 미용실 체인에 인력을 대기 위해 수 십 개의 미용학원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미용실 체인에 오랫동안 미용기기를 납품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공급조건을 조금 양보하는 대신 스텔라를 학원에 넣어 미용사 속성과정을 부탁하려 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은 루디 하디수와르노는 턱을 매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 결국 미스터 배의 문제는 스텔라를 우리한테 맡기고 나서도 동생 스테피가 남는다는 거군요?”

 

스텔라를 빼내면 스테피는 독자적으로 살아갈 능력도 없고 엄마 쪽 아버지 쪽 친척들이 저 정도 정신상태라면 어차피 스텔라와 똑 같은 상황에 처할 것이니 차라리 어딘가 고아원에 넣고 정기적으로 찾아볼까 생각하던 터였다.

 

마침 우리 교회에 그런 아이들을 돕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담당하는 장로님이 계시니 이번 주일에 뵙고 협의해 볼게요. 상황이 급한 것 같으니 오래 끌지 않겠습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루디 사장은 얼마 후 나를 불러 협의된 결과를 얘기해 주었다. 스텔라는 루디 하디수와르노 본사가 학원비와 숙식을 책임지고 단계를 밟아 정규 미용사로 키우기로 했고 스테피는 양부모를 구해 입양시키고 일단 기숙학교에 넣어 정규교육을 받도록 해주었다. 당시 스테피는 9.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보통 만 6살에 학교에 가는데 스테피는 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했고 어릴 때 정신적 충격이 커서인지 그 나이가 되어서도 기저귀를 차고 다녔다.

 

필요한 조치를 다 취할 겁니다. 스테피는 수술도 해 줄 거에요.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스테피는 심한 사시를 가지고 있었다.

두 아이의 인생은 루디 하디수와르노라는 거인의 품 안에서 그렇게 풀려 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이후 파양을 겪기도 하고 미용실 다른 직원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애인과 문제가 생기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다시는 못돼먹은 친척들에게 의지할 일 없이 커, 스텔라는 이제 족자 소재 미용실로 근무지를 옮겼고 스테피는 그 기숙학교에서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그 사이 사시를 수술로 치료받은 것도 두 말할 나위 없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가 큰 만큼 더 큰 실망을 가져다주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한 루디 하디수와르노는 그 이후 나나 아이들을 따로 불러 생색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루디 하디수와르노  

 

 

2021.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