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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

beautician 2021. 5. 5. 12:51

사유를 위한 공간

만톤 짜리 바지선 제티에 접안



그런 뜻이 아닐 텐데 갑자기 사유지가 떠오르며 지금 나와 있는 출장상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릴리네 광산 IPPKH지역에서 한 명이 죽고 네 명이 다친 4월 9일의 차량전복사고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욕망이 서로 부딪히는 모습을 투영해 주었다.

사고가 난 지역은 릴리의 회사가 탐사허가를 받은 곳, 즉 시추공을 뚫거나 각종 지질조사를 통해 광물 매장량을 확인하고 이후 채굴 경제성을 따져 보려고 지도상 좌표를 찍고 경계선을 그어 놓은 곳이다. 거기에 유니폼을 입은 다른 회사직원들이 허가 없이 들어가 자기들이 몰래 채굴할 곳을 답사하다가 아마도 또 다른 불법채굴업자 오래 전에 파놓은 구덩이에 차량이 곤두박질치면서 벌어진 사고였다.

사고가 저녁무렵 벌어져 구조작업은 다음날 진행되었는데 업체에서 나온 사람이 기자들 취재를 가로막으며 묻지 않은 질문에 극구 소리질렀다. "저 사람들은 로시니 사람들입니다!" 로시니는 그곳 정식 탐사허가를 받은 릴리네 니켈광산회사 이름이다. 그 보도를 보는 릴리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들이 거짓말하는 이유가 입고 있던 유니폼으로도 다 드러나듯 불법 채굴 목적의 불법 사유지 침범 정황이 자명했지만 문제는 그들이 얼마전 결탁한 경찰을 통해 릴리를 3주간 유치장 신세지도록 한 DNM이란 회사란 것이다.

그들은 라이센스도 없이 채굴한 물량을 실어나가려 5천톤 짜리 바지선 두 대를 제티에 접안시켰지만 광산주인 릴리로서는 규정상 당연히 서류를 만들어 줄 수 없어 바지선들은 제티에 묶인 채 억 대의 데머리지가 발생하던 차였다. 그들은 릴리의 인신을 구속한 후 경찰관을 통해 바지선 데머리지를 릴리가 부담하고 로시니의 광물수출권을 자신들에게 인도한다는 각서를 들이밀었고 릴리는 끝내 이를 거절했다. 릴리가 아무 잘못도 없는 순결하기만 한 사업가까지는 아니겠지만 동네깡패들을 몰고다니며 문제를 일으킨다는 그 회사사장의 저열한 평판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들어보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누구나 감을 잡을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몰래 때로는 강제로라도 남의 소유물을 뺏어오는 버릇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혐오하는 부류는 자기가 협박하는데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대만업체와 기본적인 조건에 합의하고 상황파악을 위해 합의 다음 날인 토요일 끈다리에 날아와 하루를 지내보면서 이 대만업체와 릴리 사이에 부딪히는 돈과 욕망의 문제, 그리고 그 사이에 완충지대 또는 조율자 역할로 기용되는 나와의 입장차도 극명하게 보였다.

 



줄을 잇고 있는 소송과 관련비용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의외로 건재해 보였고(하지만 자금부족에 시달리는 것만은 분명했다) 대만업체는 기대했던 것보다 자기 필요한 점에 집중하며 세심한 조치와 배려가 부족했다. 릴리가 언급하던 배려 부족의 문제가 분명히 있었던 거다.

난 상황파악을 위해 출장온 것인데 그들은 이 기회에 릴리에게서 뭔가 결단을 얻어내려 했다. 결국 아직 계약도 안한 나를 레버리지로 릴리의 양보를 얻어내려던 것. 그들은 릴리가 사용한 그들 자금 상환에 대한 서면 약속과 나를 감사로 들인다는 위임장을 요구했다.

여기까진 큰 문제없지만 로시니 물건 반출을 최종결정하는 광산주의 비밀번호를 주는 은행 OTP 비슷한 비밀번호 발생기가 있는데 그걸 나한테 맡기라는 것은 곤란한 부분이다. 나도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릴리 입장이라면 절대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이 분명하다. 그건 광산주의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니 말이다. 대만업체가 그렇게 원하는 것은 릴리가 자기들 생각에 반해 약속한 물건을 다른 거래선에 반출하는 걸 방지하겠다는 거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기들이 준비한 물량에 대한 비밀번호를 나한테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당초 내가 이 일을 수락한 것은 릴리의 이해에 반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이건 분명 릴리의 이해에 반하는 일이다.

내가 대만업체가 제시하는 로시니의 직책을 수락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로시니의 상당지분을 인수하고 경영을 위탁받아 할 것이란 계획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만 측은 4월 10일 저녁미팅에서 지분인수 없이 릴리의 확약서로 이를 대신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그럼 그들은 로시니의 실질적인 경영진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고 로시니의 감사가 될 나는 소속이 불분명해진다. 아니 오히려 로시니 소속이라는 게 분명해지는 것이다. 급여 등 모든 조건은 대만업체에서 받기로 했는데 말이다.

4월 10일밤 미팅을 마치고 릴리와 함께 돌아가면서 여자들만 있는 릴리 집에서 자는 대신 끈다리 시내 호텔에 내려달라 했다. 그게 마음 편한 일이었다.

또 한 편으로는 그건 대만업체의 입장과 그 배려의 섬세함 정도를 파악하는 척도가 되었다. 출장기간의 항공료 숙소 기타 비용은 대만업체가 부담하기로 약속했던 일이다. 하지만 밤 미팅을 마치면서 그들은 간단히 그 약속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나를 자기들 사람이 아니라 릴리 측 사람이라 인식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릴리가 날 케어할 거라 생각해 버렸거나 아예 그런 생각 자체가 없어던 것이다. 그들은 어차피 밤 미팅에서 자기들 원하는 바를 최후통첩처럼 내놓은 상태였으니 어쩌면 원하는 바를 반은 이룬 것인데 나머지 반을 내가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제 내가 뭘해야 하며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다. 예기치 않은 부분에서 문제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출장의 목적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이제, 상황이 복잡해지면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다. 그리고 호구잡히지 말자.

사유와 사색이 가능한 곳이란 랩탑을 자카르타에 두고 와 긴 밤 이런 생각에 골몰할 수 있도록 하는 지방 호텔 객실같은 곳이 아닐까 한다.

 

탐욕




2021.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