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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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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창의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법

beautician 2021. 5. 16. 11:19

창의적이어야 한다면서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며 비슷비슷한 개념들을 하나씩 다루다 보면 어딘가 좀 어색하거나 억지스러운 지점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완벽한 것이 없다는, 즉 세바시 같은 자기계발서도, 거기 등장하는 내로라 하는 강사들도 나름대로의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남들이 하는 말을 비판 없이 수용할 만큼 내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거나, 원래 있던 것의 다른 용도를 발견하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있었지만 그간 내가 안하던 것을 처음 해보는 것도 창의성의 범주의 넣는 강사의 말에, 그렇다면 그게 도전정신과 뭐가 다른가 생각하게 된다. 분명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어느 정도 공유하는 가치가 있긴 하다.

 

한편 당신 창의적이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사람은 창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강사의 생각은 얼마나 창의적이지 못한가? 스스로를 100%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는데 그런 대답을 단번에 믿어버리다니.

 

주변에서 창의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책이나 신문에서 본 적은 있다. 어쩌면 어린 시절엔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겪어온 교육시스템은 창의성을 짓밟고 하나의 질문에 단 하나의 답변만을 집요하게 요구하던 것인데 그런 사회를 살아온 우리에게 주변에 창의적인 사람을 보았냐고 묻다니. 그런 사람들은 이미 도태되어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다.

 

 

답정너의 그 답을 귀신같이 외운 암기력의 천재들은 검사, 판사, 의사가 되어 이 사회 높은 상류에서 독을 풀고 있는데 놀라운 창의력으로 다른 대답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한 응징을 당하고 교무실에 불려가고 경찰에 끌려가고 사회에서 추방되지 않았던가?

 

물론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업을 말아먹는 사람들은 수없이 보았다. 상무대 유격훈련 당시 고문을 당해 보고 직장 상사와 대립해 보고 극한의 상황까지 가보면서 사람들끼리 괴롭히는 방법은 정말 더 없이 창의적이라는 것을 실감했고 이후 매체와 책을 통해 알게 된 전쟁과 고문의 역사, 요즘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다양한 학교폭력의 방식들을 알게 되면서 양지에서 허용되지 않은 창의력이 음지에서 그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기 목숨이 걸리거나 다른 사람의 생명과 운명을 가지고 놀려고 하면 왜 사람들은 갑자기 지극히 창의적으로 변하는가?

 

그런 교육을 받고, 그런 현실에 적한 후  직장과 사회에서 뜬금없이  받게 되는 질문.

당신은 창의적인가?

 

난 창의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바보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책을 읽고 자료를 모아 외우고 축적한다.

어차피 요즘 모든 세상이 숭상하는 빅데이터란 것도 따지고 보면 본질은 같다. 모으고 축적해서 비교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최소한 오늘 처음 나비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고, 오늘 처음 오른쪽 가르마를 왼쪽으로 바꾸었다고, 그게 창의적이라고 얘기하는 자기계발 강사가 되고 싶진 않다.

 

 

난 이런 답안지에 동그라미 쳐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만 언젠가 청년들에게 당신은 창의적인가 물을 자격이 주어질 것 같다.

 

 

2021.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