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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저 아래쪽 카테고리의 글들 소개^^

beautician 2021. 5. 22. 12:57

미리 쓰는 자서전

 

내 블로그에서 열심히 업데이트되는 카테고리들은 영화, 출판, 기사번역 등이 주종이고 인니 주술과 귀신, 인도네시아 근-현대사도 심심찮게 포스팅이 늘어나는 부분입니다. 신변잡기나 그냥 기록을 위해 남겨 둔 포스팅들을 다 합치면 전체의 30%쯤 됩니다. 만물상의 전형이죠.

 

이중 오래된 글들을 분류해 카테고리 맨 아래에 놓아두었는데 대부분 예전 힘들 때 쓴 것들, 내 사업을 하던 시절 회한에 잠긴 밤 시간에 적은 그 글들은 대부분 내가 실패한 이야기, 주변사람들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밑바닥 블루스>라는 제목을 단 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느 새 2011년은 12월까지 내달려 버렸고 월초부터 송년회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자카르타 시내에서 열리는 한 동문 송년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 시간을 대려고 사무실에서 포장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나는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뭐, 솔직히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주인공이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내 인생인데 말이죠.

 

이게 당시 쓴 글들의 기조였습니다. 글을 쓰면서 내가 이 에피소드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새삼 절절히 느끼면서 정말 난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나 한 걸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당시 한 두 편으로 글이 끝나지 않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글을 몇 차례에 걸져 연재하는 식으로 포스팅하면서 내가 글을 엄청 길게 쓰는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닫기도 했습니다.

 

<밑바닥 블루스>는 미용기기 수입판매를 하던 당시 자카르타 메이가 수금한 돈이 잔뜩 든 가방을 버스웨이 소매치기들과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경찰로부터 지켜내려 분투하던 이야기입니다.

 

<우리동네 천사들>은 얼마 전 잠깐 소개했던 바딱족 소녀 스텔라와 스테피의 모험 이야기.

 

<박치기 대마왕>은 약속한 월급의 반만 주면서 나가려면 나가라 했던, 하청공장 종업원들 앞에서 내 귀싸대기를 날렸던 사장이 있던 봉제공장에서의 6개월. 이 얘기도 잠깐 소개했던 것 같습니다.

 

<적도에 부는 바람>은 2002년 내가 파산하기까지의 과정. 내가 밟은 지뢰를 다른 이들은 밟지 말라는 마음으로 쓴 전형적인 실패담이었습니다.

 

그 이후엔 사기꾼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인도네시안 드림>은 망간사업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펑펑 치다가 스스로 사기꾼의 길로 달려가 버린 한 남자 이야기.

 

<크리스킴의 몰락>은 한국인 미용사 크리스 킴이 자카르타에서 온갖 물의를 일으키다가 결국 사기치고 야반도주하던 전 과정. 그리고 베트남으로 흘러 들어간 그가 호치민에서 한 식당 금고를 오함마로 때려 부수고 또 다시 도주하던 서스펜스 스릴러.

 

<인니출장 본부장님>은 옛날 미스코리아의 산실이었던 ‘세리미용실’의 후광을 업고 온 본부장 직급의 출장자가 현지 화교들을 대상으로 30만불쯤 사기를 치려 했던 사건입니다.

 

<영업직원 활약사>는 정말 창의적으로 사고를 쳐대던 우리 영업사원들 이야기. 단순히 돈을 들고 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기와 협박과 주술이 온통 얽히면서, 가장 믿었던 메이의 약혼남은 회사 돈뿐 아니라 메이의 패물까지 들고 눈썹을 휘날리며 도주합니다.

 

가장 최근인 2017년쯤에 썼던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은 릴리와 술라웨시 니켈광산들을 다녔던 2013년~2014년의 이야기입니다. 릴리가 어느 날 광산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두 남자와 함께 광산에 올라가 달라고 했습니다. 나도 늘 러시아제 쇠구슬 발사 에어건을 차에 넣고 다니던 마당에 그들이 당연히 경비원이나 안전요원이라 생각했지만 좀 이상했죠.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한 사람은 70대. 또 다른 사람은 착 달라붙는 멋쟁이 옷에 뺵구두를 실은 어딘가 날라리. 알고 보니 그들은 무당…..

 

모두 다 어딘가 발표하거나 공모전에 내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너무 힘들어서, 또는 스스로 입장을 정리하느라, 그것도 아니면 지금 정리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다 잊어버리고서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라는 위기감으로 적었던 글들입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습니다. 상황과 감정이 그 과정에서 갈무리된 겁니다.

 

앞으로도 경험을 토대로 쓰고 싶은 글은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싱가포르와 호주로 보내 공부시키면서 부침을 거듭하던 사업상황에 노심초사하던 마음. 릴리가 뼬렛주술에 걸려 사업을 거의 말아먹던 시절 외국인인 나와 루벤 필사적으로 릴리의 손을 잡아주던 동안 정작 릴리의 형제들은 릴리의 광산을 거덜내던 상황(사실 이건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뒷부분 에피소드로 생각했던 것인데ㅠㅠ), 문협에서 겪었던 자칭 문인들의 웃기고 자빠라진 행태와 부조리한 등단 시스템, 불과 몇 안되는 꼴통들이 분열시키는 교민사회…… 등등

 

하지만 딱히 스스로의 삶을 책으로 쓸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 주인공이라 여겨지지 않으니 말이죠.

 

나는 주변 사람들 삶의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갖습니다.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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