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기록자의 의무

beautician 2021. 5. 20. 11:57

기록을 나누는 의미

 

 

기록을 남기고 그것을 나누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은 언론인, 기자들일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오래 살면서 초창기에 느꼈던 것은 교민들이 한국을 너무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한국에 돌아가 업데이트해 주지 않으면 발전하는 한국과 관련된 소식을 따라잡지 못해 옛날 같으면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지 않을 뿐이지 버스비, 담뱃값이 얼만지도 모르는 남파간첩 취급을 받기 쉬웠습니다. 당시 한국 소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한인 슈퍼마켓에서 빌려보던 한국 예능 비디오들, 일주일에 2~3차례 비행기를 타고 들어와 가입자들에게만 2~3일 늦게 배포되는 조선일보 등 한국신문들이 다였고 속도 느린 인터넷으로 접근가능한 한국소식들은 동영상은 어림도 없었고 고작 신문사 인터넷 지면 정도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버스비, 담뱃값은 좀처럼 나와있지 않았으므로 오랜만에 한국가면 남파간첩 기분이 드는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이 점점 발전해 6개월에 한번 통화하던 한국 부모님, 친지들과 마음만 먹으면 매일 무료통화를 할 수 있고 한국 TV 방송들을 실시간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온 이후엔 오히려 우리가 오래 살아온 이 곳 인도네시아에 대해 너무 모르게 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더욱이 이젠 한국방송을 듣느라 그간 그나마 시간을 할애했던 인니 신문 방송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지 교민 상당수가 인도네시아나 한국 양쪽 모두에 대해 잘 아는 듯 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결핍을 느끼는 것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직도 발행되고 있는 ‘교민세계’ 같은 오프라인 교민정보지들의 시대가 몰락하고 데일리인도네시아, 한인포스트, 자카르타경제신문 같은 온-오프라인 동시발행 매체들이 부각되자 요즘은 인니포스트, 인니투데이 등 그 숫자가 더 늘어나 번역기사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억6천만 명이 사는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벌어지는 뉴스들을 모두 커버하기엔 여전히 태부족입니다. 물론 현지 한인들이 실생활과 별 관계없기 쉬운 그 뉴스들을 모두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꼭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기 쉽다는 게 문제일 거죠.

 

그러다가 코로나가 닥치고 교민사회 활동이 위축되면서 정보가 요긴해지자 나도 뭔가 교민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2월 말에 그간 일을 봐주던 곳과 결별하면서 크게 수입이 줄었는데 아마 당시 코로나로 인해 궁지에 몰리던 교민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를 그래서 더욱 공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가끔 하던 일이었지만 그해 3월부터 2~3개월 정도 거의 매일 1~2개 정도 현지 신문기사들을 번역해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 밴드에 올렸습니다. 좋아요 같은 표시는 거의 붙지 않았지만 조회수가 어느 정도 나오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교민사회에 도움은 되는 것 같아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에겐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누가 날을 잡아 본격적으로 얘기해 준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대수롭지 않게 흘러나온 얘기들을 스스로 종합하면서 우리 집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좀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른 누구도 관심 둘 리 없는 그 일을 가족들 당사자, 내가 관심 갖고 기록하지 않으면 내 다음 세대에선 전혀 모르는 얘기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달성에서 강경으로 시집왔던 할머니를 사랑해마지 않았던 할머니의 아버지, 활달하고 리더십 충만했던 내 할아버지가 일본 어느 탄광으로 징용 갔다가 2년 만에 고향 동료들과 함께 돌아오던 길에 히로시마 원폭으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처럼 퇴각하는 국군들에게 납치당하듯 국군에 징병되어 6.25 전쟁을 통틀어 전방과 후방에서 동료들의 피를 뒤집어 쓰면서도 악귀처럼 끝내 살아남았던 큰아버지, 강경상고 기독교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진주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처형장으로 가던 길에 인민국 고위군관이 되어 나타난 오촌 아저씨 덕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곧바로 피난길에 올랐던 아버지와 할머니, 그 5촌 아저씨 때문에 육사 신원조회에서 떨어진 사촌형,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ROTC와 군목으로 장교계급장을 달 수 있었던 나와 내 동생, 함흥 출신으로 흥남부두를 통해 가족들과 함께 남하한 어머니와 형제들, 전쟁에서 돌아온 큰아버지의 기행과 그로 인해 벌어진 사촌들 사이의 반목과 비극.

 

언젠간 그런 얘기들을 제대로 정리해야 할 거라 생각하면서 한국 돌아가면 아버지 인터뷰를 거창하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증 치매가 날로 악화되는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는 이제 90대에 들어서서도 자식들 앞에선 힘든 모습 보이지 않으려 하는데 그 연세에 어머니를 홀로 돌보는 게 어렵지 않냐는 말에 아버지는 늘 이렇게 답하시죠. “내가 받아 놓은 밥상인데 어쩌겠니? 젊은 시절 너희 엄마가 나 때문에 속 썩었으니 이젠 당연히 내 차례일 뿐이야.” 지금은 하루 종일 어머니를 돌보느라 전화할 짬을 내기도 힘드시죠. 자식들 중 딸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조금 수월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얘기들을 몇 번쯤 아들과 딸에게 해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얘기를 듣는 것 같은 반응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의미가 없을 그 일들을 우리 가족들만은 기억하고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글을 쓰는 사람,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은 나름 사회와 가족에게 꼭 해야 할 어떤 의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은 없는데 말이죠.

 

2021. 4. 25.

 

https://blog.daum.net/dons_indonesia/687?category=1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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