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도를 아십니까? 본문
전혀 다른 이야기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이들을 열광시킨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론이 스스로를 나와 나 아닌 것, 나와 그림자, 긍정과 부정,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로 한없이 세분하면서 때로는 스스로를 서스팬스 스릴러 심리 사이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느끼게 만드는 경향이 분명 있습니다. 흉악한 범인을 잡으러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알고 보니 그 범인이 결국 나 자신이더라 하는 이야기들 말이죠.
발상의 전환은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없이 필요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너희들 생각은 다 진부해. 이런 쪽으론 생각해 본 적 없지?’라며 바쁜 사람들 옷깃을 잡아 끄는 게, 그 방식이나 목소리의 톤, 용어의 선택에 따라 짜증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철역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는 ‘도를 아십니까?’ 인생사 모든 것을 조상 탓 프레임에 대입하는 방식은 오랜 기간 다양한 임상실험까지 마친, 잘 준비되고 정리된 마케팅 기법이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현실의 각박함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프로이트와 지하철 도사들이 일정 부분 어필하는 것은 그 본질이 기본적으로 판타지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은 누구나 다 어떤 사안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즐기고 때로는 열광하지만 문제는 그 달라진 시각이 내 세계관, 내 가치관과 너무 거리가 생기면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는 겁니다. 그 시각의 옳고 그름, 또는 개연성 여부는 완전히 떠나서 말입니다.
오래 전에 [하다하다 별 걸 다]라는 제목으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서 해석이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라도 되는 듯 자기 마음대로 끌어 쓰면서 사람들 마음과 세상에 독을 타던 목사들을 보면서 그런 성서 해석 나도 한 번 내키는 데로 해보자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성서는, 그것도 특히 창세기의 앞쪽은 누구도 목격한 바 없고 증명도 할 수 없는 태초와 고대의 일들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상징과 암호로 표시되어 있었고 그 이해와 해석에 있어 목사들에게만 성령이 역사하고 다른 인간들에게 악령들만 달라붙어 속삭이란 법도 없었습니다. 물론 암울하기 짝이 없던 2017년 초 심하게 삐뚤어져 있던 나에겐 필시 악령이 달라붙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나중엔 교민 포털에서 아예 제목부터 [어그로를 끌어보자!]라고 달고 온갖 참람한 주장들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도 이런 것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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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경계를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은 사실 인간 성장의 전형을 비유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악과란 나무 열매와 유창하게 사람의 말을 하는 뱀이 정말 있고 우리 순진한 선조가 뱀의 감언이설에 속아 후손인 우리에게 영원한 원죄가 남겼다는 창세기 3장의 에피소드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설마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뱀을 피할 수는 없었던 걸까요?
뱀을 피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지은 고귀한 존재들조차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간’이죠. 사람들을 배를 땅에 붙이고도 물 흐르듯 움직이며 날쌔게 공격하는 뱀에게서 ‘속도’를 느꼈을 지 모릅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빠른 시간이고 시간은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알게 된 첫 번째 선악의 구분이란 게 왜 '옷을 입지 않으면 부끄러운 것이다' 였을까요? 그건 어린 아이가 그 피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성장하여 마침내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을 수 있는 나이쯤 되면 판단력이 생겨 가장 처음 옷을 벗고 다니는 게 창피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는 당연한 이야기가 인류 파멸의 원죄 에피소드로 둔갑한 건 아닐까요?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은 결혼한 아담과 하와가 분가하여 따로 가정을 구축하는 것을 뜻하겠죠. 그 후 내용은 인간들이 성장하면 당연히 벌어지는 일들과 각각의 의무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렸다는 벌 역시, 인간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농사는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농사'란 생계를 위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의미할 것입니다. 성장한 여성이 겪는 출산의 고통 역시 성인여성의 당연한 역할 중 하나인데 그럼 성서의 기자는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하고 겪어야 하는 일들은 왜 신이 내린 형벌이라는 뉘앙스로 기술한 걸까요? 그는 사람이 원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지 않았다면 다가왔을 유토피아리는 게 고작 무위도식 하는 나태한 삶, 임신도 출산도 없는 불임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그건 아니겠죠.
어쩌면 창세기 3장을 쓰던 시기, 창세기 기자의 마음이 2017년 초 [하다하다 별 걸 다]를 연재하던 내 암울하던 마음처럼 어딘가 꼬여버려서 지극히 당연한 삶의 원리를 저주 가득한 원죄의 에피소드로 둔갑시켰던 건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현대 신학은 시작부터 해석이 틀렸으니 그걸 기반한 뒤의 모든 해석들도 다 틀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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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은 무소불위, 광대무변 하다고요. 광대무변이란 그 끝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내가 아는 것과 차이가 나면 사실은 내가 그 광대무변한 신의 모든 것을 이미 속속들이 다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넌 다 틀렸고 너희들은 참람하다고 너무나 쉽게 손가락질하고 이단으로 몰아갑니다. 그 옛날 마녀로 몰린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화형 당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전제와 나의 가정법, 나의 남다른 시각과 가치관을 누군가에게 납득시키려면 그만큼 나 역시 얼마든지 납득 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공평한 거죠.
“너 이건 생각도 못했지? 이제부터 내가 알려 줄게.”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적정횟수는 ‘도를 아십니까?’와 동일하게, 일년에 최대 세 번 쯤인 것 같습니다.
2021.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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