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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해외에서 가장 두려운 일

beautician 2021. 3. 21. 13:28

고립무원이라는 것

 

 

오래 전 큰 빚을 지고 망해 본 적 있는데 그게 해외에서 벌어졌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물론 국내에서 망해본 적이 없어 어느 쪽이 더 곤란한 상황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해외에서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는 것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교통사고에 휘말리거나 누구에게 보이스피싱을 당해 돈을 사기당하거나 몸이 아파 입원하거나 하면 대개의 경우 도와줄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나고 그 도움의 수위는 그간 내가 쌓은 공덕, 내 재무상태에 비례하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파산해 맨몸으로 벼랑에서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간 살갑게 지내던 사람들이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하죠. 등을 돌리진 않더라도 내가 마치 치명적 바이러스를 가진 보균자라도 되는 것처럼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다가오지도 손을 잡아주지도 않는 게 보통입니다.

 

 

안전거리 유지  

 

그런 일이 착하고 만만한 친인척들이 지천에 널린 한국이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을 다 끌어 모아도 한 줌도 안되는 해외에서 벌어진다는 건 참 곤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현지에서 최대한 주변을 정리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야반도주해서라도 돌아갈 한국의 보금자리까지 모두 날린 상태라면 이젠 절대 피할 수 없는 지옥문이 내 코 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닌 상황이 되는 것이죠.

 

그때 체감했던 것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시시각각 선택지가 급속히 줄어들어 절박함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 선의를 마음 한 가득 품은 누군가가 나타나 날 구원해 주긴커녕 그런 상황을 귀신같이 포착한 사기꾼들과 모리배들이 몰려들어 마지막 남은 비상금마저 털어먹으려 하고 때로는 더 큰 빚을 지도록 유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날 채용하겠다는 사람들은 어떤 조건을 내밀어도 당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내 입장에 편승해 헐값으로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려 했습니다. 골프샵 설립을 의뢰했던 사람은 일이 끝나자 약속한 수고비 대신 나를 점원으로 채용하겠다며 대인배 행세를 했고 부득이 현지 회사를 비우며 대신 관리해 줄 것을 부탁했던 사람은 1년 후 돌아와 마치 내가 부당하게 눌러 앉아 있는 것처럼 등을 떠밀며 쫓아냈었죠.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한 봉제업체에서는 하청공장 종업원들이 모두 보고 있던 생산라인에서 사장에게 귀싸대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게 40대 초반의 일이었고 두 번째 날아오는 귀싸대기를 살짝 피하자 그 스윙에 얼마나 몸무게를 실었으면 스텝이 꼬여 작업하던 옷더미에 다이빙하듯 쓰러져 파묻혀 버렷어요. 난 그날 밤 해고되었고요.

 

파산 후의 생활은 양육강식의 야생이었어요. 그 와중에서도 밤 늦게 귀가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 인터넷 모 게시판에 이런저런 글을 쓰곤 했는데 그게 당시 유일한 낙이었고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깝게 지내던 고교 동문후배가 다가와 이렇게 속삭이더군요. “형 상황에 글 쓰는 것도 다 사치 아니오? 그냥 조용히 살면서 살 길이나 찾으세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당연히 그런 상황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이 되어 남았습니다.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도 물리적인 것이죠. 그래서 2015년 1년 3개월 간의 베트남 체류를 마치고 돌아와 떠날 때 맡겨 두었던 자카르타의 기본 생계수단이 거의 망가져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계를 확보하려면 다니는 직장, 하는 사업 하나에 올인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파산 당시 깨달았고 베트남에 간 것도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가지고 있던 생계수단들이 한꺼번에 모두 무너져 버린 것이죠. 내게 세웠던 계획들이 모두 비수가 되어 날아와 등에 푹푹 박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다행히 그때 죽진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대학을 마치고 취직하면서 자립하던 중이었습니다. 짐이 많이 가벼워져 있던 그땐 어쨌든 40대 초반 파산했던 상황보다 백 배 나았던 겁니다. 그때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날 에볼라 바이러스 보균자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이 시기의 경험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절대 자랑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미화화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난 그 경험을 통해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절박한 상황을 함께 지냈던 아이들은 이후 미용기기 수입판매 사업이 어느 정도 돈을 벌어주면서 보낼 수 있게 된 싱가포르와 멜번의 대학에서 수학했지만 학비 외에는 자취비용을 간신히 커버할 만한, 그래서 퀄리티 있는 여가생활이 애당초 불가능한 아슬아슬한 생활비를 가지고도 아무 불평 없이 4년씩 유학생활을 했으니 어쩌면 경제적 궁지에 몰린 자카르타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경험이 아이들 생활력과 독기를 끌어 올려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게 당시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객지에서 등에 비수를 여러 번 맞아 본 사람들은 웬만한 다른 것들이 무서울 리 없습니다.

해외 생활 10년 넘게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경험이죠.

 

 

2021. 3. 7.

 

 

빈 지갑에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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