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피해자가 가해자로 본문
쌈닭의 트라우마
막 영화진흥위원회에 2월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동향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원래 5일 마감인데 하루 먼저 보냈으니 선방한 겁니다. 정신건강에도 무지 도움이 되죠. 이제 남은 마감은 데일리에 보낼 괴담뿐. 오늘은 밤새 귀신들 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할 판입니다.
요즘 인도네시아에서는 코로나 직격을 맞은 영화관에 1년 가까이 손님이 들지 않아 극장흥행을 기대할 수 없는 일반 영화제작사들이 OTT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신작영화를 개봉하면서 종래의 스튜디오 상영관에서 온라인으로 영화판의 주도권이 옮겨가는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스타워즈 제국군의 최종병기 데스스타처럼 접근하며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아마존프라임, 라이온스게이트 플레이 같은 세계적 거물들에게, 강력한 미사일을 품고 요격하러 달려드는 스카이 루크의 저항군 전투기들처럼 세무당국을 비롯한 관련 부처들이 다른 나라에서도 유례없는 법령들을 들이밀며 벌떼처럼 달라붙어 세금 내놓아라, 투자 내놓아라 하며 목을 조르는 전초전이 막 시작되는 중이죠.
말하자면 대대적인 변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 고인 물과 흘러온 물이 부딪히며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고 있는 겁니다. 환경이 변할 때, 드라마 속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 대개 갈등이 시작되고 때로는 결과적으로 의도치 않은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간 사업가의 명찰을 ‘작가’ 명찰로 바꾸어 달고서 이미 20년 넘게 살았던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한인사회에 연착륙을 시도하던 시절 서로 자기 품이 안기라며 양팔을 활짝 벌리던 A와 B라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 어느 쪽도 아닌 두 사람 사이, 중간에 내려 앉은 건 내가 아무 품에나 안기는 싸구려 인간도 아니거니와 그 두 사람이 서로 죽고 못사는 원수 사이라는 것을 그간 교민사회와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던 내 귀에도 여러 번 들렸기 때문입니다. 양쪽 모두 자기 손만 잡으라 종용했지만 난 그럴 이유도 그럴 용의도 없었습니다. 내가 나이를 이만큼 먹었는데도 낯선 사람이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의도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행동해라 요구하는 것이 이미 웃기는 일이었어요. 그런 일이 인도네시아 교민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2018년 문협 인니지부에서 제명되었는데 양다리를 걸쳐 모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였습니다. 미술협회에서도 활동하면서 국악협회에서도 장구를 치면 대개는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말을 듣는 게 보통이지만 A는 자기 원수인 B의 동아리에 동시에 가입한 상태를 활발한 활동이 아니라 비열한 양다리로 규정한 겁니다. 사실 난 A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교민 어르신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자기 등 뒤에 병풍처럼 둘러놓고 날 몰아붙이려는 의도는 잘 알겠지만 그건 오히려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할 소리 다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여기 가입하면 당신 병사가 되어 총 들고 나가 당신 원수와 싸워줘야 되는 겁니까? 왜 그래야 해요? 그리고 양다리라고요? 그럼 회장님은 왜 가정이랑 문협이랑 양다리를 뛰세요? 한쪽만 하세요! 한국이랑 인도네시아를 뭐하러 왔다 갔다 해요? 한 군데에서 그냥 사세요!”
그로부터 2년 후엔 그분의 원수 B와도 손절하게 됩니다. B는 A처럼 70대 오빠들을 병풍을 둘러놓고 다굴을 놓는 천박한 일진 스타일은 아닙니다. 시간을 들여 주변 여론부터 하나하나 다져 자기 편으로 만들어 가는 용의주도함은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그 놈은 도대체 왜 나한테 허락을 안받는 거야?” 지인을 통해 한 다리 걸쳐 들은 그의 불평이란 현재의 내 위상은 다 자기가 만들어준 것이니 내가 뭔가 하려면 자기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정말 궁금한 건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나는 쏙 빼놓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만 그 얘기를 하고 다니는 거였고요.
난 A와 B가 왜 그토록 서로 못잡아 먹어 난리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똑같은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남의 등에 비수를 꼽고 남의 가슴에 난도질을 해대고 나서도 굳건하고도 뻔뻔스럽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두 사람은 대사표창 뭐, 이런 게 아니라 아카데미 여우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내가 정작 놀란 것은 그런 일이 벌어져도 난 별로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나도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것도 인도네시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법인장과 창고장의 텃세를 마주했을 때였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누군가 새로운 환경에 들어갈 때 벌어지죠. 멀리 오지의 현지법인에 새로 부임해 온 사람이 자신들이 영위하고 있던 은밀한 이익을 자기도 모르게 위협하는 상황이 생기거든요. 그들은 밤새 몰래 내 차 타이어에 칼자국을 내, 출근길에 타이어가 터지면 차가 톨 가드레일에 처박혀 내가 영영 출근하지 못하길 바랬습니다. 칼집은 낸 건 내 운전사였어요. 아내는 1년 가까이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이상한 전화를 받으며 무서운 협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나도 아내도 몸무게가 엄청나게 빠졌고 결국 본사에 돌아가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너무 어렸고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둔감해진 모양입니다.
오히려 어느새 다른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 가끔 반성합니다. 특히 그 A와 B에게.
202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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