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정의감을 내려놓을 때 본문
빨리 괴물이 되고 싶다.
가장 힘든 시련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후폭풍을 맞는 것, 특히 그 후폭풍을 내가 아닌 내 가족들이 맍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치기어린 정의감에 빠져 살던 시절엔 누가 날 좀 욕하고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 정도는 당연히 견뎌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70~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누구나 평균치의 악의와 폭력에 노출되어 살았고 어느 정도 면역력도 가지고 있었으니 내가 조직논리와 집단적 이기심, 대기업의 특성이 최대치의 탐욕 같은 것에 동조하지 않고 맞서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동조하는 정도가 적극적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태클을 당하고 떄로는 보복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일상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일말의 정의감과 양심이 있는 이들은 군대나 기업같은 조직에서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들은 결국 더러운 꼴 보지 않겠다고 사표를 던지거나 회사의 총알받이로 여기저기 돌려막는데 쓰이다가 결국 너덜너덜해지면 버려지고 마는 것이죠.
인도네시아에 처음 왔던 30대 초반, 설립 후 매년 적자를 내고 있는 현지법인은 감출 것이 너무 많아 한국 본사로 귀임해야 할 전임자들은 내가 자기들이 그간 벌여 놓은 사고와 부실들을 알게 되더라도 기꺼이 감춰줄 사람인지 먼저 평가하려 했으므로 인수인계 과정에서 당연히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현지법인에서 일한다고 뭔가 큰 돈을 벌게 되거나 승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전임자들이 쳐놓은 금전사고를 본사 몰래 대신 떠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별짓을 다해도 강경한 입장을 꺾지 않자 그들은 내 아내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여러 경로를 통해서요. 첫 해외생활을 하던 아내는 신경쇄약에 걸렸고 난 고작 회사일에 아내까지 걸 수 없었어요.
문제는 자신들의 비리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인데 이미 벌어진 상황이 그들에게 가자아 안전하게 끝나는 방식은 비리가 없어지거나 그걸 아는 내가 없어져야 했죠. 하지만 이미 저질러 놓은 비리가 없어질 리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날 없애려 했고 내 차는 출근길 고속도로에서 바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하면 내가 죽든 아내가 견디지 못하게 되든 최악의 파국이 올 것을 실감했습니다.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런 비슷한 상황을 겪는 주변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 전부터 다시 일을 봐주기 시작한 한 회사에서도 빨간 불이 켜져 사이렌 소리를 내는 사안들이 여럿 보입니다. 그 뒤에서 장난치고 있는 사람들의 손길도 보이고요.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할 일은 일이 굴러가도록 하는 거지 범인들을 잡아 족치는 게 아냐.'
잘 생각해 보면 나를 시련에 빠뜨리는 건 그 나쁜 놈들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어줍잖은 정의감이 늘 나와 내 가족들을 벼랑으로 등떠밀곤 했습니다.
한 명의 나쁜 놈을 무찌르고 나면 그보다 더한 놈이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주변을 어지럽히죠. 그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의감을 슬며시 내려놓고 나면 대부분의 시련과 갈등은 가라앉기 시작하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적이에요. 바이러스처럼 사회의 작동을 둔화시키고 때로는 멈추게 하죠. 그러니 그런 마음은 일부 정치인들과 목사님들이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잘 보관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순수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청춘들을 만나면 좀 불편하고 짜증이 납니다. 아마 20여년 전 자카르타에 부임한 날 처음 만났던 그 전임자들이 그런 마음이었겠죠. 종국에는 죽이고 싶을 만큼.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괴물이 되어갑니다.
'그 사람 욕할 것 없어. 사람들한테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어쨋든 식구들 풍족하게 잘먹이고 애들 다 좋은 학교 보냈잖아? 그럼 좋은 가장인 거야."
하지만 빨리 괴물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런 소릴 듣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2021. 3. 11.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신승리는 치명적 자살행위일까? 유일한 생존의 방편일까? (0) | 2021.03.29 |
---|---|
나쁜 친구를 대하는 법 (0) | 2021.03.27 |
집단 따돌림과 미얀마 시위대 (0) | 2021.03.24 |
순리대로 살아질까요? (0) | 2021.03.23 |
꼰대의 완성은 중독의 결과 (0) | 2021.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