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일반 칼럼 (228)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TV 뉴스를 빨갱이가 장악했다는 교수님 오랫동안 서울대 교수를 하다가 은퇴하신 의학박사를 자카르타에서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백발임에도 안광이 형형하고 지혜로운 표정을 한 점잖은 분이었습니다. 그날 있던 출판기념회 행사 때문에 아침에 호텔로 모시러 갔을 때 함께 아침식사를 하면서 동석한 다른 교수님들에게 그 다음 주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서 내가 발표자로 나가는 양칠성 세미나 관련해서 고견을 얻고자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러저러한 배경을 가진 양칠성을 친일반역자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일제강점기를 기어코 살아낸 선량한 민초라고 봐야 할까요?" 질문을 잘못 이해했는지 교수님들의 답변은 내 질문과 별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견해는 너무 의외였습니다. 노교수님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펼쳐지..
세상의 모든 관문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대략 몇 개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의 숫자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문'이란 기본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으로 이동해 가는 포털'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 어떤 환경이 펼쳐져 있느냐가 문을 통과하는 '입장' 행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그래서 우리가 평생 몇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느냐보다 어떤 문들을 여느냐, 이것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큰 가치를 갖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역사를 바꾼 문들이 많았습니다. 요새와 성들의 관문들. 그 문들은 무너지거나 또는 정 반대로, 열리지 않음으로써 역사의 향방을 바꾸었습니다. 당태종..
제 눈의 들보 "당신이 남들에게 범한 작은 잘못은 큰 것으로 보고 남들이 당신에게 한 큰 잘못은 작은 것으로 보라" 유태인의 인생지혜라며 나열된 여러 항목들 중 이 내용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 난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였다가 이제 중동의 깡패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뭘 배울게 있을까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유태인들의 가치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사실이고 탈무드가 지혜의 보고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아직 많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벌어지던 극우집회에서도 가끔 국기가 등장하는 다윗의 별의 나라 이스라엘에 대해 내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저 위의 문장은 마땅히 따라야 할 보편적 우주적 진리입니다. 요컨대 내 잘못에 더욱 엄격하고 남의 잘못엔 관대하..
꼰대 인증 "나는 해야 할 말 다 했으니 이제 여러분들이 좋은 안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선배는 그렇게 멘트를 남기고 단톡방에서 나가버렸습니다. 후배들은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 습니다. 단톡방에서 우리 모임의 운영규칙을 두구 전체 회원들 간에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그 선배는 뜬금없이 운영부 안을 이해하기 쉽게 도표로 설명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동문끼리 만나는 친목모임인데 그는 이전 회칙과 회칙 수정안 비교표를 만들어서 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누구도 그 요구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친목회의 회장단, 사무국을 맡은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이 생업을 위해 운영하는 사업체나 월급을 받는 소속 회사가 있는 사람들인데 별 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많은 품을 팔라고 요구하는 건 지나친 일이라고 ..

이준석과 화해한 윤석렬의 행보 대통령이 되고 싶은 후보가 도움될 만한 사람들과 무조건 제휴하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더니 여기저기 가서 약속하고 사과하고 뒷담화하면서도 결국 각자의 색깔과 맛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끌어모았다. 이 광경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그의 의지가 어쩌면 정반대의 결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란 예측이었다. 다양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의 표를 모두 얻기 위해서 통합의 잡탕찌게에 매운 맛(김병준), 단 맛(이준석), 쓴 맛(김종인)을 아낌없이 털어 부었고 거기에 금태섭(떫은 맛) 등 온갖 재료를 투하하며 스스로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 하는 모습. 그 잡탕찌게는 정말 다양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울 만족스러운 맛이 나올까? 아니면 이 땅의 개, 돼지들을 위한 오묘한 맛의..

끝말 잇기 1997년 태국발 외환위기로 시작된 아시아 경제위기가 지나고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금융계 판도가 한바탕 정리된 시점에, 한 금융사에서 파견나온 한 고교동창은 자신이 속한 금융기관이 그 사이 합병된 상대 은행 자카르타 지점 청산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보안유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업무와 관련되지 않었음에도 해당 상황에 호기심을 보이는 교민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고 극도로 말을 아낀 것은 물론 식사자리에 참석할 초대받아도 웬만하면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개인적으로 술을 마실 때마다 나를 대작 상대로 불러내곤 했는데 혹시라도 술 먹다 업무상 어려움도 토로하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을 씹게 될 경우 아무 이해도 엮이지 않고 절대 말도 옮기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기꾼 감별을 위한 체크포인트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사기꾼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해외에서는 특히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사기꾼이라 불리는 이들은 대개의 경우 상황에 떠밀린 사람들입니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피해까지 입히게 된 겁니다. 타지에서 바닥을 치며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 중엔 사기꾼까지 되진 않았지만 그 경계까지 아슬아슬하게 갔던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돌이켜보면 나도 언젠가 어느 지점에서 자칫 생각 잘못하고 판단이나 행동을 잘못 했으면 지금쯤 사기꾼이라 손가락질 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우리가 사기꾼이 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정말 신의 가호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사기꾼이 되..

인도네시아 무슬림 사회 수면 밑 무속의 세계 코로나가 세상을 바꾸면서 언젠가부터 인도네시아 몇몇 지역 마을 앞에 밤마다 길고 하얀 베게 같은 것이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뽀쫑(Pocong)이라 부르는 것인데 귀신의 일종이다. 귀신이 아니라면 최소한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시신인데. 무슬림이 죽으면 장례규범에 따라 생전에 사용하던 의복과 장식구를 벗긴 후 염을 하고 까인까판(Kain Kafan)이란 천으로 망자의 몸을 모두 넉넉히 감싼 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끈으로 6~7군데를 단단히 묶어준다. 묘지로 옮겨갈 준비가 된 이 상태를 ‘뽀쫑’이라 부른다. 죽음을 가장 시각적으로 구현한 뽀종은 사실상 죽음의 동의어다. 그래서 무덤 속에서 있어야 할 뽀쫑들이 돌아다니는 건 기절초풍할 일이다. 대개 뽀쫑이 돌아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