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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옹졸함 사이

beautician 2021. 12. 10. 12:19

 

꼰대 인증

 

 

"나는 해야 할 말 다 했으니 이제 여러분들이 좋은 안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선배는 그렇게 멘트를 남기고 단톡방에서 나가버렸습니다.

후배들은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 습니다. 단톡방에서 우리 모임의 운영규칙을 두구 전체 회원들 간에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그 선배는 뜬금없이 운영부 안을 이해하기 쉽게 도표로 설명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동문끼리 만나는 친목모임인데 그는 이전 회칙과 회칙 수정안 비교표를 만들어서 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누구도 그 요구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친목회의 회장단, 사무국을 맡은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이 생업을 위해 운영하는 사업체나 월급을 받는 소속 회사가 있는 사람들인데 별 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많은 품을 팔라고 요구하는 건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현재 회장단보다 10년쯤은 더 위인 그 선배에게 현재 회장이 어렵게 얘기를 꺼내며 그 요구를 완곡히 거절하자 그 선배는 눈썹을 휘날리며 단톡방을 나가버렸습니다. 화가 난 것이고 자기 화난 걸 알아달라는 거였죠.

 

그 선배의 요구가 할 수도 없는 일을 하라는 식의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의를 갖춰 어렵게 양해를 구하는 현재의 회장에게 그런 식으로 무안을 주며 무작정 방을 나가버린 그 선배의 행동이 빈축을 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선배는 자기 말을 곧바로 이행하지 않으려는 후배가 무례하다 생각한 것이겠지만 우리가 군대 제대한 게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후배들 생각은 확실히 달랐어요.

 

"저분 왜 또 저러시는 거야?"

"삐지면 몇 년씩 회에도 나오지 않은 적도 있어."

"원칙주의자여서 원칙을 벗어나는 행태를 용납하지 못하는 거야."

"아무리 회원 대부분이 저분 아래 기수라 해도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게 저분 원칙인 거야?"

"문제점에 대한 의사표시를 하시는 거야"

"맘에 안든다고 나가버리는 게 의사표시라고? 군에서도 맘 안들면 탈영하셨겠네?"

 

이런 얘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의 그런 행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회칙을 개정하려면 늘 그가  반기를 들었습니다. 의사정족수가 안된다, 의결정족수가 모자란다, 절차가 틀렸다, 문구 해석이 잘못되었다.......그는 회칙이 걸리면 거의 모든 사안에 반기를 들며 자기 의견을 주장했고 꼬투리를 잡고 바지 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래서 쉽게 갈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어려워졌죠.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원칙이었고 정의였습니다.

 

그걸 부인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원칙과 그의 정의는 사람들을 꽁꽁 얽어매기만 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회를 만들려면 일반 동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애당초 예수나 공자같은 성인들만 받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동문도 아니고 현재 살아있지도 않다는 사소한 문제들을 극복해야 했지만요.

 

일주일 쯤 후 그 선배는 단톡방에 다시 입장하자마자 규칙 개정에 대한 자기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어쨋든 대선배가 다시 돌아왔으니 다들 다행스럽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배는 이번에도 자기 말만 하고 다시 단톡방에서 탈퇴해 버린 것입니다. 후배들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후배라 불리는 회원들은 대학 갓 졸업한 20-30대가 아니라 자카르타 교민사회에서 법인장급 정도로 나름대로 각자의 조직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었습니다. 그 선배의 행동을 무례하다 느끼는 건 후배들이 막되어먹은 놈들이어서가 아니란 뜻입니다.

 

같은 문제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다른 동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내 의견을 피력했지만 논의에도 참여해 반대의견을 들어볼 생각이니 이 방에서 탈퇴하진 않겠습니다. 널리 양해 바랍니다."

 

양해를 얻어야 할 사람이 그가 아님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이 멘션을 본 그 단톡방의 후배들은 그 밑에 엄지척 이모티콘을 줄줄이 달았습니다. 그는 앞서 막무가내로 단톡방을 나가버린 선배보다 한참 후배였지만 이미 50대 후반에 접어들어 그 역시 많은 이들에게 선배라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인물이 대비되면서 그래서 다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서의 선배는 저가 권위를 지키는 많은 방법들 중에서 하필이면 자기 할 말만 하고 단톡방에서 뛰쳐나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하고 난 너희 말을 듣지 않겠다는 태도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죠. 그러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이면 또 다시  돌아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또 나가 버릴 터였습니다. 뭐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이해하려 마음 먹는다면 무엇인들 이해 못할 게 있을까요.

 

하지만 내가 뭐든 말하면 이견달지 말고 그냥 쳐들어!라고 요구하는 건 '원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게 권위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옹졸함이고 꼰대인증일 뿐입니다.

 

50대쯤에 누구나 겪게 되는 그 꼰대의 관문을 더 젊은 나이에, 또는 20-30대에 들어서는 사람들도 물론 있고, 어떤 이들은 70-80대가 되어서도 끝내 꼰대화에 굴복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발견은 그 꼰대의 관문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이 그 문턱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도, 수긍하지도 않는다는점입니다. 단톡방을 뛰쳐나간 그 선배도, 늘 잘 관리한 몸매에 짙은 색 상하의를 갖춰 입으며 세련된 맵씨를 보이지만, 그걸로 꼰대임을 감출 수 없는 이유는 입만 열면 그 본색을 누구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꼰대가 그렇게 무섭습니다.

 

 

2021. 12. 6

(2018. 11.3 원본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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