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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관문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대략 몇 개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의 숫자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문'이란 기본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으로 이동해 가는 포털'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 어떤 환경이 펼쳐져 있느냐가 문을 통과하는 '입장' 행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그래서 우리가 평생 몇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느냐보다 어떤 문들을 여느냐, 이것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큰 가치를 갖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역사를 바꾼 문들이 많았습니다.
요새와 성들의 관문들. 그 문들은 무너지거나 또는 정 반대로, 열리지 않음으로써 역사의 향방을 바꾸었습니다. 당태종의 백만대군 앞에서 고구려 안시성의 견고한 성문이 끝내 열리지 않아 당과 고구려의 운명이 바뀌었고 이여송이 평양성 성문을 뚫고 들어가면서 임진왜란 육전에서 승승장구하던 왜군이 수세로 돌아서게 됩니다. 열리거나 열리지 않아 역사를 바꾸는 문들. 우리 개개인의 삶에서 마주치는 문들은 당연히 우리 인생 경로와 방향을 바꾸었을 것 같습니다.
그 문들이 꼭 손잡이와 경첩이 달린 물리적인 것들만은 아니었겠죠. 그 추상적인 문들 중 대표적인 것이 '교문'과 '군문'이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탄생 '이라는 보이지 않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해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우린 '인간 '이라는 종이 되고 대개의 경우 성별과 신분, 국적과 지연, 부모와 인척 관계 등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사용할 기본 스팩 거의 대부분을 결정지을 기본 패시브 능력치와 스킬을 부여받게 되는 거죠.
사실 탄생 이후 우리가 열어 젖히며 전진하게 되는 모든 문들은 탄생의 관문을 거쳐 나오면서 결정된 것들의 철저한 영향 아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인생이란 건 처음 정해진 것을 웬만해서 바꾸기 힘든 게 됩니다. 그게 힘들다 보니 개천에서 용나는 게 그렇게나 기적적이며 때로는 온통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되기도 하고 학교를 같이 다녔던 재벌 2세가 20-30년 후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고 내가 그 밑에 기어들어가 일하게 될 확률은 90%를 넘는 세상이 된 것이죠. 좀 억울하긴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생겨먹은 것 같습니다.
'탄생 '말고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까요? 물론 그건 본인이 선택하기 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지만 전생의 내가 피안의 저편 어딘가에서 다시 한번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탄생을 결정하는 버튼을 눌렀을지도 모릅니다. 그 전생에서 나라를 한번 구했다면 이번 생이 좀 바뀌었을까요? 물론 전생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모두들 이 세상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웹소설에서 쏟아져 나오는 전생, 환생, 회귀 테마의 스토리처럼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다면 이번 생이 어쩌면 너무 시시해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다가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만나게 되는 마지막 관문은 '죽음 '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말, 육체의 소멸, 요단강이나 스틱스 강을 건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것이라 엄숙하고 숙연해지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또 하나의 '관문 '으로 받아들인다면 꼭 안타깝고 을씨년스럽고 불길하고 외롭고 처연하고 불행한 사건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린 매일의 일상에서 늘 만났던, 그러나 이번만은 약간 다른 환경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문'을 만나는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탄생의 관문을 통해 신분, 지위, 재산, 배경 등을 타고 나고 그에 따른 일정한 업적과 인기마저 대체로 결정되어 버리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벗겨버리며 모든 개개인에게 공평하게 다가오는 죽음이란 더욱 민주적인, 어쩌면 전혀 다른 차원의 고귀한 관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들은 본의든 아니든 내가 가진 모든 소중한 것들을 대체로 유지한 채 통과할 수 있지만 죽음의 관문은 그 모든것을 문 앞에 남겨두고 지나가야 합니다. 심지어 그 관문 너머로는 우리의 육체마저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든 모든 것을 뒤로 하는 것이니 매우 아쉽고 때로는 많은 회한을 남길 것 같지만 반대로 어쩌면 매우 홀가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집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지나온 모든 문들을 통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앞에 뭔가를 놔두고 와야 했던 경우가 사실은 적지 않습니다. 결혼, 이직, 이사, 이민 같은 것들 말이죠.
어떤 이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는 모든 것 버리고 들어서야 하는 만큼 그 안에 완전히 다른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문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견디기 힘든 슬픈 현실조차도 문앞에 놔두고 가게 되니까요. 그래서 종교적, 윤리적 이유로 대체로 비난하게 되는 자살이 어쩌면 가장 논리적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하기도 했습니다. 탄생 자체를 내가 결정하지 못했다면 죽음조차 내 손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요? 이 부분은 언젠가 다른 기회에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어쨋든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어떤 관념과 태도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슬플 수도, 담담할 수도, 때로는 벅찬 기대에 가득찰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난 언젠가 내게도 다가올 죽음이란 관문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지 생각하곤 합니다. 가능하다면 저 미지의 세계로 이어질 그 관문을 가장 큰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즐겁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와도 이 마음 절대 변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21. 12. 8
(2018. 7. 8. 원문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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