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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교민사회에선 입조심

beautician 2021. 12. 1. 11:51

 

끝말 잇기



1997년 태국발 외환위기로 시작된 아시아 경제위기가 지나고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금융계 판도가 한바탕 정리된 시점에, 한 금융사에서 파견나온 한 고교동창은 자신이 속한 금융기관이 그 사이 합병된 상대 은행 자카르타 지점 청산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보안유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업무와 관련되지 않었음에도 해당 상황에 호기심을 보이는 교민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고 극도로 말을 아낀 것은 물론 식사자리에 참석할 초대받아도 웬만하면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개인적으로 술을 마실 때마다 나를 대작 상대로 불러내곤 했는데 혹시라도 술 먹다 업무상 어려움도 토로하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을 씹게 될 경우 아무 이해도 엮이지 않고 절대 말도 옮기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금융사라는 사회 자체가 일상적으로 그 정도 수준의 절제가 필요한 곳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당시엔 좀 지나치다 싶은 피해망상, 과잉자기보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재원으로 막  파견된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한번쯤 교민사회의 ‘끝말 잇기’ 함정에 빠져들어 곤욕을 치르는 현실을 생각하면  자카르타처럼 한정된 교민사회에서 그는 분명히 현명한 처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 아무 의미 없이, 또는 전혀 다른 의미로 꺼낸 한 마디가 교민세계의 폐쇄회로를 돌면서 왜곡될 데로 왜곡되어 급기야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가 되어 자기 뒤통수를 항해 날아들곤 하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자카르타 생활 초기에 그 함정에 걸려 든 적이 있습니다. 해외로 나와 가족과 지인들을 떠나 외로움을 병처럼 앓던 아내를 위해 종종 해주었던 우리 회사 이야기가 아내와 단시간 내에 가까워졌던 이웃의 공기업 주재원 부인을 통해 흘러나가 그 폐쇄회로를 돌다가 우리 가족 전체를 공격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심한 우울증이 생겼고 이를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끝말잇기

 


그래서 자카르타의 고수들은 아내의 입단속 잘 하라며 후배들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해외에서 서로 돕고 살아야 마땅한 교민사회의 선배들이 설마 악의적으로 말을 비틀고 왜곡할 리 없다고 믿으며 충고를 개의치 않는 순진하고 선량한 젊은 주재원 부부들이 실제로 예상치 않은 말꼬리를 잡혀 말도 못할 고통을 받는 모습을 그간 적잖게 보아 왔습니다. 대개는 정작 그 주재원보다 그 부인이 더 깊은 내상을 입고
고국과 친정을 그리며 숨죽여 베갯잇을 적시곤 하죠. 말수가 줄고 만나는 사람들을 의심하며 마치 정치판 외줄타기를 하듯, 살얼음판 위를 걷듯 속마음을 단단히 틀어 잠그고 엄선한 단어와 두려운 마음으로 아무 의미없는 몇 마디만을 꺼내면서도 자기 말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라고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또 뭔가 실수한 것이 없는지, 다의적으로 해석될 이야기를 하진 않았는지, 그래서 남편이 또다시 내일 아침 무슨 터무니 없는 구설수에 말려들게 되는 것은 아닌지 가슴 졸이는 챗바퀴 속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견디지 못해 남편을 놔두고 혼자 귀국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중엔 그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자기 스스로 이웃들 하는 말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퍼뜨리는 교민사회 독버섯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충분한 은행잔고와 든든한 회사나 공장, 오랜 현지경험과 튼튼한 인맥을 구축한 교민사회의 어른들과 거물들 역시 구설수와 얘기의 와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누군가 자폭을 감수하지 않는 한 그들의 뒤통수에 비수를 던질 만용을 부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교민사회 끝말 잇기에 뒤통수가 깨지고 등에 비수가 박히는 피해자들은 항상 지사원, 현지채용 직원, 자영업자, 목회자와 선교사, 유학생, 그리고 그 아내들 차지이곤 합니다. 사고로
입원한 교인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한 것뿐인 어느 목사 부인을 여집사들이 집단으로 방문해 그 말꼬리를 잡아 비틀고 왜곡하면서 터무니없는 혐의를 만들어 대예배 때 교인들 앞에서 공개사과 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하죠. 

 

내 입에서 떠난 중립적인 커멘트 한 마디가 교민사회의 악의를 만나는 순간, 누구나 터무니없는 파국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치명적인 끝말 잇기의 단 적인 예를 들어 볼까요?

물론 이건 소설입니다.

 
(
장면 1 : 토요일 저녁 코리아타워 식당)


직원1 ; (동창선배들과 함께 저녁식사에 반주를 하며) 너무 걱정 마세요. 일이 암만 힘들어도 반드시 끝이 있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좋은 결과도 나오겠지요. 봐요, 즐겁게 생각하면 자카르타의 밤거리도 좀 어둡긴 해도 평온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이잖아요?
친구, 선배 ; (웃고 직원1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며) 왁자지껄
~
 

(장면 2 : 선배1의 침실)


선배1 ; (잠자리에 들며) , 그 친구, 고생 많이 한다고 술 한잔 사주려 했는데 오히려 내가 위로 받은 셈이 됐네. 사고방식도 괜찮고 자카르타의 밤을 아름답게 볼 줄도 알더군.
선배1의 아내 ; (궁시렁거리며) 당신이야말로 날 좀 아름답게 볼 줄 알아 봐욧
!
 

(장면 3 : 다음날 오후, 집사님댁)


선배1의 아내 ; (예배 마치고 집사님 댁에서 차 마시며) 어젯밤에 남편하고 또 싸웠어요. 남편 후배가 자카르타가 아름답다나 쓸데없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 것 때문에…
집사님 부인 ; 이런 자카르타가 아름답다는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자카르타에 모아둔 돈이 무지 많을 거야. 십중팔구 차도 볼보나 벤츠일 거구
.
신도부인1 ; 아니면 아주 어리고 예쁜 현지처가 있거나
.
모두들 ; (킥킥 거리며) 옴마나, 옴마나
~

(장면 4 : 무궁화수퍼)


신도부인2 ; (집사님 댁에서 나와 귀가길에 장보다가 남편 후배 부인 만나서) 남편 일은 잘 된데요? 요즘 공장들 많이 문 닫는다는데…
후배부인 ; 올해도 안되면 문닫고 가야 된데요. 자카르타도 지긋지긋하고 그 돈이 뭔지…

신도부인2 ; 큰일이네요. 누군 나이도 얼마 안된 사람이 모아둔 돈에 고급차에 현지처까지 챙기고 사는 모양이던데
.
후배부인 ; 누구요
?
신도부인2 ; 우리 교회 다니는 분 남편 후배라든가? 요즘 교민지 광고에 나오는 XX라는 회사 다닌다던데…
?
 

(장면 5 : 그날 저녁, 신도부인 집)


후배부인 ; (골프치고 막 돌아온 남편을 닦아 세우며) 누군 자카르타 온지 1년도 안돼서 볼보 타고 다닌다는데 당신은 10년 동안 나한테 고물 끼장 말고 태워준 게 또 뭐 있어? 당신은 맨날 골프만 치다가 어느 세월에 돈 벌어 올래??
남편 ; 또 무슨 소리 듣고 와서 이러는 거야? 나 지금 피곤해
!
부인 ; 당신 꼬라지 보는 내가 더 피곤해!! 혹시 당신 골프 친다고 나한테 사기치고 그 XX회사 다니는 그 놈처럼 현지처 만나고 온 건 아니지? 불어! 이 인간아
!!!
 

(장면 6 : 월요일, 어제 그 남편이 직장에서 상담중)


손님 ; 허허, 요즘도 사랑싸움 하시나? 웬일로 근래 보기 힘들던 오선지를 또 얼굴에….
어제 그 남편 ; XX사 다니는 어떤 미친 놈 때문에… 1년도 안된 직원이란 놈이 현지처에 볼보에… 돈까지 많다니 그 얘기 듣고 우리 마나님이 바로 음악을 다시 시작…, 하여튼 직원이 그 정도로 하고 다닌다면 십중팔구 회사 돈 꽤나 뒤로 빼 쓴 모양이죠. 그 회사도 앞날이 뻔해
.
손님 ; XX 회사라면 우리 윗집 사는 OO 교회 집사네 회산데? 1년도 안된 직원이라면 그…. , 그것 참, 그 놈 보기랑 다르게 막 되먹은 녀석이었군
.
 

(장면 7 화요일 오전 티타임)


손님부인 ; 얘기 들어보니 자기 남편회사에 본사에서 온지 1년쯤 됐다는 그 젊은 사원 있잖아? 자기가 전에 킹카라던 그 친구. 소문 들어보니까 아주 못돼 먹은 놈이래. 현지처에 꿈쳐 논 돈도 있구. 회사 돈 해먹은 거 본 사람도 있다는데 자기 남편 그거 안데?
XX
회사 사장부인 ; (화들짝 놀라며) 뭐시라??? 그 새끼가 인물 값 하네. 전화기, 전화기
!!
 

(장면 8 : 10분 후 XX 회사 사장실)


직원 1 ; (사장실 들어서며) 부르셨습니…깍!!(날아드는 재떨이 이마로 막으며)
사장 ;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이 개~~ 새끼야!!! 어째 요즘 잔고도 잘 안 맞고 실적도 엉망이다 싶더니, 이 새끼가 계집질에 회사 돈을 해 쳐 먹어?? 증인도 있어!! 대질신문 시키기 전에 다 불어!! 불라니까
!!
직원 1 ;
.???(!!!)


끝말잇기의 고리를 끊는 방법, 또는 그 메커니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스스로의 입을 꼭 다물어 버리는 것 뿐입니다. 교민사회의 와전과 왜곡의 온상인 교회나 동창회를 멀리하는 것도 한 방편입니다.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이웃집 한국여자, 발넓은 구역장님 부인 등을 철저히 경계하고 아내를 무인도나 독방에 감금하여 교민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요즘도 누군가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화살같은 말들이 교민사회에서 떠돌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고,  이제 해외생활 경력 30년 다 되어 가는 데도 이따금 내 등에 박히는 비수에 살짝 피를 토하며 주화입마에 빠지기도 하면서 여러 해 전 그 금융사 친구의 철저한 신중함이 새삼 더욱 존경스러지곤 합니다.

 

2021. 11. 26

(2016년 9월 6일 원본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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