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마음 부담을 하나 줄이는 일

해야 할 일, 하지 않아도 될 일, 하면 안되는 일 원래 널널할 예정이었던 8월에 에정에 없던 일들이 추가되면서 갑자기 마감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13일 출판진흥원: 현지 출판사들의 팬데믹 대책 현황 보고서 16일 한국언론진흥재단: '인니정부 헛발질 코로나 대응에 대한 언론보도' 원고 23일 한국전략개발연구소: 현지 아동 및 노인 복지서비스 1차 보고서 30일 영화진흥위원회: 현지 상영관산업 현황 보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들어 열흘 정도 대체로 멍때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시간을 소비했는지 스스로 납득이 잘 안가지만 한번 왕복에 하루가 거의 다 깨지는 BSD에도 그간 세 번씩이나 다녀왔기 때문일 수도 있고 16킬로 감량목표를 세운 후 5킬로 정도 빼면서 찾아온 무력감, 초조함, 코칼로리 음식에..

차차의 사춘기

청춘 오늘은 이슬람 새해입니다. 당연히 인도네시아는 휴무입니다. 아침에 차차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아이들 얘깁니다. 마르셀이 오늘 휴일이라는 사실에 한탄하고 있다는 거에요. 예쁘게 생긴 마르셀은 유치원도 다니기 전부터 여자애들이 줄을 서서 따라 다녔는데 2년쯤 전부터 살이 찌기 시작하고 팬데믹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는 동안 점점 더 사각형이 되어 갔습니다. 학교 간지가 이미 1년 반도 전의 일이 되었는데 줌으로 하는 수업에서 본 '펠리시아'라는 여학생에게 마음을 뺏긴 모양입니다. 얼마 전엔 펠리시아가 뽀뽀해 주는 꿈까지 꾸었다고 한 걸 차차 엄마가 살짝 귀띔해 주더군요 학교엔 못가더라도 줌으로 펠리시아를 만나야 하는데 하필 오늘 왜 휴일이냐며 한숨을 쉬더랍니다. 초등학교 6학년 마르셀에게 사춘기가 ..

아스트라제네카 2차 접종 시도(지정날자 이전)

시행착오 자카르타에서는 사회활동제한 4단계가 8월 13일까지 다시 일주일 연장되었지만 같은 4단계의 내용은 매주 달라집니다. 이번 주부터는 몰과 종교시설이 문을 열고 수용인원의 20%인가 25%를 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원래 9월 1일로 날짜가 박힌 백신 2차 접종을 오늘 받아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 2차 접종은 1차 접종일로부터 8-12주 사이인데 9월 1일은 그 12주를 꽉 채우는 날이지만 오늘로 일단 8주는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틀 전에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해 놓고 오늘 접종장소인 따만앙그렉 몰에 갔습니다. 따만앙그렉 몰. 끌라빠가딩에서 50분 정도 걸리는 자카르타 남부의 고급 몰 중 하나. 금주 영업재개 예정이지만 아직 영업 전. 그래서 오직 주차장 6층의 엘레베이터를 ..

안들리는 척

깊은 뜻 아침에 브로커가 정부 모부처 직원과 채팅한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코로나 위험에 직면한 상태인 '비타민 10000'을 네 명분을 보내줄 수 있냐는 공무원 말에 브로커는 물어보고 연락주겠다고 합니다. 나한테 물어본다는 거죠. 그 이야기 오간 게 8월 2일인데 일주일만인 오늘에야 나한테 던진 겁니다. 딱 보는 순간 이게 비타민을 달라는 건지 돈을 달라는 건지 조금 헷갈렸습니다. 비타민이라면 돈도 얼마 안드니 자기가 사주면 될 것이고 영수증 보고 합당하면 돈을 주면 되는 겁니다. 우리 일을 위해 연락하는 공무원 담당자라니 말입니다. 피오나에게 물어보니 그건 분명 돈을 달라는 얘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한테 보낸 문자에는 돈을 달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간 이 친구가 작년에 수천만원을 뜯어간 방..

태국산 야자 제품

야자의 진화 한국엔 이미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긴 야자를 처음 먹어 보았습니다. 저 위에 동그란 것이 원래 튀어나와 있는데 손가락으로 콕 누르면 빨대가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원래 좀 밍밍한 맛이 나는 야자액에 설탕이 들어간 듯 꽤 단 맛이 나더군요. 세상 편해졌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 편으로는 과하다는 생각도 드는 제품입니다. 원래 야자는 안의 물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음료 중 하나고 그 안 벽면의 하얀 막은 숫가락으로 긁어서 먹어도 되고 말려 가루를 내서 인도네시아에서 만드는 수많은 음식의 재료로도 쓰입니다. 야자 껍데기에서는 섬유를 추출해 이불이나 베개의 충전제로 쓰고 그래도 남는 것은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원래 야자열매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천연 재활용 제품입니다. 그런데 저..

번역은 소설가의 재활훈련

슬럼프 일도 몇 개 짤린 김에 차제에 마감 스트레스의 화신답지 않은 여유로운 8월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예정에 없었던 원고의뢰들을 덥썩덥썩 받아 8월 중순 유래없는 마감 지옥이 형성되었습니다. 1-2주 앞에 블랙홀 같은 마감일정들을 줄줄이 앞둔 주말, 또다시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써지지 않네요. 이런 슬럼프의 약은 번역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쓰지 않을 때엔 번역을 한다는 얘기를 읽은 적 있는데 크게 공감되는 얘기입니다. 머리를 쥐어짜 뭔가 없는 글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이미 있는 글의 옷을 바꿔 입히는 번역은 확실히 준비운동 내지 재활운동 같은 성격이거든요. 오늘까지만 슬럼프에서 헤매고 내일부터 미친듯이 써내려가지 않으면 원고마감일 내 책상 위에서 핵구름이 피어오를지도 모르겠..

고양이들의 천국을 위해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경우 어제는 검정색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차차네 엄마가 어제 저녁 보내온 사진과 동영상에서 죽어가던 그 검정고양이는 자기 형제들보다 조금 더 크고 사람을 잘 따르며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놈이었습니다. 식탐이 많아 음식을 주던 내 손가락을 몇 번이나 물고 발톱으로 할퀴어 피를 냈던 놈이죠. 내가 가면 늘 내 주변을 맴돌던 그 놈을, 상황이 된다면 집에 데려다 키우려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으므로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미가 죽은 후 차차가 우유를 먹여 키웠고 조금 큰 후엔 마르셀이 이런저런 고양이 뒤치닥거리를 했으니 아이들이 펑펑 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마르셀이 목놓아 울다가 결국 메이네 회사운전사를 도와 동네 화단에 묻어주는 일도 끝까지 같이 했다고 합니다. "마르셀, 고양..

사업하기 정말 힘든 나라

대박사건 고급 아파트 열 동을 지으려는 건설시행사가 있습니다. 자카르타의 부자들이 입맛을 다실 만한 시설을 집어넣고 비싸게 팔려는 계획이죠. 그런데 정부가 올해 새로 법을 만들어서 그 열 동 중 두 동은 서민아파트로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시행사는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하죠. 부자들 사이에 빈민과 중산층 사이 어딘가쯤의 경제적 위상을 가진 사람들을 살게 하려면 일단 그들 구매력에 맞는 저가의 아파트를 만들어야 하고 주차문제, 관리비 문제 등등 갑자기 고려해야 할 일이 수만 가지가 생기기 떄문입니다. 우선 미리 해놓은 설계부터 모두 바꿔야 하는데 그 비용 만도 수억 원이 듭니다. 게다가 서민 아파트 두 동의 유닛 가격은 정부에서 정한답니다. 그러면서도 시행사가 판매이익을 추구해도 된다고 허용하죠. 하지만..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망, 그 희망을 위한 고결한 희생

인생영화 원래 2016년 처음 맺었던 영화진흥위원회 통신원 계약은 매월 한국에서 주는 주제에 맞춰 현지시장 조서보고서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때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향해 가던 시대. 문체부 산하단체인 영진위도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고 연간 12번 내야 할 보고서를 네 번쯤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도 그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인도네시아는 필요할 때에만 특정 주제에 대한 조사를 하는 비정기 보고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앞으로 12월까지 한 두 차례 더 쓰게 될 보고서 주제를 한국에서 보내준 목록들 중 선정해 오늘 메일을 보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산업에 관심이 있어 영진위 일을 하는 거지만 보고서들이 좀 더 산업 쪽, 관련 정책 쪽을 조명하는경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