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206

인도네시아 집안 출입이 허용된 파충류

찌짝(Cicak) 옛날 한옥 대들보 위에 사는 구렁이는 집안 조상신이나 성주신의 현현이라 하여 내쫓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렁이가 사는 집엔 쥐나 해충도 없었다고 해요. 사이즈 측면에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에도 비슷한 개념의 파충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법 무시무시하지만 이 찌짝(Cicak)이란 놈은 원래 이렇게 예쁘게 생긴 도마뱀입니다. 어린 놈들은 몸체가 상당히 투명하기까지 하고 보통은 손가락 크기, 커 봐야 손바닥 정도 크기입니다. 옛날 근무하던 북부 자카르타 공단의 한 공장 벽에 저녁 퇴근무렵이 되면 이 찌짝들이 공장 벽 위로 우글우글 올라왔는데 그 때쯤 기승을 부리는 날파리들, 모기들을 앞다투어 잡아먹는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집에서도 모기나 작은 벌레들을 잡아 먹으니 이로운 동물이..

통번역의 미래

번역 옛날에 소설 쓰고 수필 쓰던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을 가끔 하는 이유는 소설, 수필은, 물론 때로는 사전 취재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머리 속 구상이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작업이었으므로 랩톱을 열고 워드 프로그램을 띄우자마자 작업이 가능한 상태였어요. 하지만 요즘은 주로 조사보고서나 기사를 쓰다보니 사전에 광범위한 번역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6월까지 하던 영화진흥위원회 월간 보고서는 한달 내내 모은 관련 기사들을 토대로 200자 원고지 50-70장 정도를 쓰는 것이었는데 하루에 하나 이상의 관련기사들을 번역해 두는 게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번역하다 보면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기사들이나 자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클릭수를 노리는 기사들은 제목과 내용이 다른 경우..

구국의 영웅들의 이름을 딴 도로 위에서

꼼수 자카르타 중앙통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럿이지만 끌라빠가딩에서 도심 톨을 타지 않고 일반도로를 통해 들어가는 건 아흐맛 야니(Ahmad Yani) 도로에서 쁘라무카(Peramuka)를 거쳐 디포네고로 도로를 통해 중앙통인 수디르만 거리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입니다. 여기 언급한 꽃이름이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소년단(보이스카웃)을 뜻하는 쁘라무카를 제외한 도로 이름들은 모두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된 사람들의 이름을 딴 것들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1825-1830년간의 자바전쟁에서 네덜란드 총독부 부대를 극한으로 몰아쳐 연전전패를 당하던 네덜란드가 그를 막으려고 자바 섬에 단기간에 수백 개의 요새를 지으면서 총독부 금고는 물론 본국 금고까지 거덜내는 상황까지 처하게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수디르만 장군..

일인당 햄버거 두 개가 국룰

물가에 내놓은 아이 당연한 일이지만 인도네시아 맥도널드에도 드라이브 스루 창구가 있습니다. 일인당 한 개가 국룰이지만 작년에 아들이 싱가포르에서 돌아와 자카르타에 8개월간 같이 지내는 동안 일인당 두 개를 먹는 걸로 국룰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아내는 다이어트 중이라 차차와 마르셀을 위해 버거 네 개를 샀습니다. 더블치즈버거 둘, 맥치킨 하나, 피시버거 하나. 하지만 그 집에 입이 더 있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몇 마리 남지 않은 고양이들을 위해서 뭔가 사가야 한다는 걸 까먹었어요. 아이들은 맥치킨과 피시버거를 하나씩 먹고 더블치즈버거 두 개를 남겼습니다. "일인당 두 개가 국룰이라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완강합니다. 엄마가 퇴근하면 주겠다는 겁니다. 식기 전에 먹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이들 마..

마르타박은 왜 마르타박일까?

마르타박(Martabak)의 비밀 마르타박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요? 인도네시아식 팬케익? 일종의 계란전? 이게 헷갈리는 이유는 우선 마르타박 마니스와 마르타박 떨로르라는 두 종류의 마르타박이 서로 너무 틀리기 때문입니다. 얘네들이 마르타박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이유가 우선 이상하기 짝이 업습니다. 마르타박 마니스는 버터를 두른 1인치 깊이의 팬에 비전의 액상 밀가루 반죽(?)을 부어 케익을 만들고 그 위에 깨, 초콜렛, 치즈 등 각종 토핑을 얹어 반으로 접은 겁니다. 부드럽고 맛있지만 넘쳐나는 식용유 함유량 때문에 금방 질린다는 단점이 있죠. 마르타박 떨로르는 밀가루 반죽을 얇고 넓은 만두피처럼 만들고 그 안에 계란이나 오리알 베이스에 각종 야채와 싸구려 다진 소고기를 넣은 후 만두피를 접어 사각형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전

탑승트랩 8월 17일은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 그에 걸맞게 오늘 모든 신문들이 76주년 독립기념일을 맞아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정치인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관련 연설을 담았습니다 그에 못지 않게 8월 23일까지 연장된, 그러나 실제 내용은 여러 부분 상당히 완화된 코로나 관련 사회활동제한조치(PPKM) 소식, 그리고 어제 개회한 인도네시아 상원격인 MPR 국회 연례회기 개최 소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걸 다 합친 정도의 기사량을 보인 것인 아프가니스탄 카불 함락소식이었습니다. 예전 911사태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인도네시아인들도 자체적으로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그 일부를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 보내 탈레반 편에서 미군과 싸우게 했었죠. 거기서 돌아온 아프간 전사..

자카르타 Steak 21의 위용

스테이크 먹기 ROTC 소위 임관하기 직전인 1986년 2월 한화그룹에 막 입사했을 때, 당시 아직 한화 계열사였던 경인에너지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교육 그 자체보다 맛있고 정갈한 연수원 음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때 회덥밥을 처음 먹어보고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나 싶었습니다. 군시절 군사분계선 가까이 GOP 안에 있던 우리 부대에서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캠프 그리브스'라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거기 장교클럽에 자주 가면서 당시 한국 수퍼에서는 구할 수 없던 버드와이저, 미켈럽 같은 맥주들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간혹 이런저런 특식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어느날 피가 줄줄 흐르는 미디엄-레어 쿡의 스테이크가 그렇게 입안에서 살살 녹는 음식이란 걸 처음 알았습니다. ..

홍범도 장군 유해가 봉환되는 날

광복절 네 건의 마감원고들 중 간신히 하나 끝낸 상태지만 원래는 16일(월)에 마감하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원고 달랑 하나만 있던 것이 갑자기 늘어난 겁니다. 하지만 그 16일 마감원고 때문에 포가한 것이 현지 역사단체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에서 주최하는 독립기념일 세미나였습니다. 2018년부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한국인 전사들'이란 테마로 독립전쟁(1945.8~1949.12) 기간 동안 네덜란드군 점령지역이던 서부자바 가룻 지역에서독립군 유격대 활동에 참여한 양칠성, 국제만 같은 사람들을 조명하던 히스토리카가 올해는 일제강점기(1942~1945) 당시 중부지바 암바라와(Ambarawa)에서 고려청년독립당을 만들고1 일본군 병영에서 무장봉기했던 한국인 군무원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려 했습니다. 하..

땅그랑에 등장한 풍자 벽화의 운명

예술의 한계와 대통령 연임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얼굴을 그린 거리의 화가를 경찰이 뒤쫒고 있다는 CNN인도네시아의 8월 13일 기사를 번역하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허용가능한 예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전엔 초상권 침해를 피하기 위해 저런 식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물론 검정 사각형을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고 그렇게 인물 특정을 피할 수 있었는데 경찰은 저게 조코위 대통령 초상이라고 확신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눈 위에 씌여진 '404: Not found'라는 문구는 입력한 URL 주소의 웹사이트를 찾을 수 없을 때 화면에 뜨는 에러 메시지인데 그걸 조코위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였던 거죠. 자카르타 인근 땅그랑시의 한 작은 교량 밑 통로 벽면의 이 벽화는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