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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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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인도네시아 집안 출입이 허용된 파충류

beautician 2021. 8. 30. 11:20

찌짝(Cicak)

 

옛날 한옥 대들보 위에 사는 구렁이는 집안 조상신이나 성주신의 현현이라 하여 내쫓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렁이가 사는 집엔 쥐나 해충도 없었다고 해요.

 

사이즈 측면에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에도 비슷한 개념의 파충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법 무시무시하지만 

 

 

 

이 찌짝(Cicak)이란 놈은 원래 이렇게 예쁘게 생긴 도마뱀입니다. 어린 놈들은 몸체가 상당히 투명하기까지 하고 보통은 손가락 크기, 커 봐야 손바닥 정도 크기입니다. 

 

옛날 근무하던 북부 자카르타 공단의 한 공장 벽에 저녁 퇴근무렵이 되면 이 찌짝들이 공장 벽 위로 우글우글 올라왔는데 그 때쯤 기승을 부리는 날파리들, 모기들을 앞다투어 잡아먹는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집에서도 모기나 작은 벌레들을 잡아 먹으니 이로운 동물이라 여겨 집안에 출몰하는 찌짝은 잡거나 쫓지 않는 게 관례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찌짝이 너무 작은 도마뱀이란 것이고 인도네시아 바퀴벌레들 중에선 작은 찌짝보다 더 큰 놈들이 대부분이란 것이죠. 빠르고 강인하고 먹성 좋고 잘 죽지도 않는 바퀴벌레와 찌짝이 싸우면 아무래도 바퀴벌레가 이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바퀴벌레가 나타나면 좀 문제가 됩니다. 단층집이나 아파트 저층에 살면 매일 나타나는 바퀴벌레가 어느 정도 아파트 고층에 살면 잘 나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바퀴약을 뿌리면 때로는 바퀴벌레보다 찌짝들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찌짝이 살면 바퀴약을 뿌리는 게 좀 꺼려집니다.  눈앞에 나타난 바퀴벌레를 잡는 게 아니라 숨어버린 놈을 잡으려고 싱크대 밑이나 냉장고 뒤에 바퀴약을 뿌리면 자칫 찌짝이 바퀴약을 뒤집어 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내가 사는 아파트 고층에 바퀴벌레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찌짝도 흔히 나타나는 놈이 아니기 귀한 손님입니다. 그렇게 귀히 여기는데도 불구하고 찌짝은 사람이 나타나면 엄청난 속도로 다리를 움직여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곤 합니다.

 

아직 마음이 통하지 않은 거죠. 

하지만 언젠가는 찌짝들에게 내 호의를 꼭 알리고야 말겠습니다.

 

2021.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