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구국의 영웅들의 이름을 딴 도로 위에서

beautician 2021. 8. 27. 12:01

꼼수

 

자카르타 중앙통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럿이지만 끌라빠가딩에서 도심 톨을 타지 않고 일반도로를 통해 들어가는 건 아흐맛 야니(Ahmad Yani) 도로에서 쁘라무카(Peramuka)를 거쳐  디포네고로 도로를 통해 중앙통인 수디르만 거리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입니다. 여기 언급한 꽃이름이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소년단(보이스카웃)을 뜻하는 쁘라무카를 제외한 도로 이름들은 모두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된 사람들의 이름을 딴 것들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1825-1830년간의 자바전쟁에서 네덜란드 총독부 부대를 극한으로 몰아쳐 연전전패를 당하던 네덜란드가 그를 막으려고  자바 섬에 단기간에 수백 개의 요새를 지으면서 총독부 금고는 물론 본국 금고까지 거덜내는 상황까지 처하게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수디르만 장군은 1945-1949년 사이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군이 당시 공화국 임시수도인 족자를 급습해 수카르노 대통령, 하타 부통령,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 등을 비롯한 공화국 정부 요인 거의 대부분을 나포되어 인도네시아란 국가 자체가없어지다시피 했을 때 일천한 병력과 무기, 그리고 결핵으로 망가져가는 폐를 가지고 끈질긴 게릴라전을 벌여 마침내 인도네시아를 부활시키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죠. 

 

그 두 도로가 만나는 영광스러운 곳에서 난 경찰을 만났습니다.

 

오늘은 8월 20일. 그리고 내 차는 홀수.  짝수 날에는 짝수만 다녀야 하는 홀짝제가 시행되는 시기에 그 홀짝제 시행지역인 중앙통 수디르만 도로로 막 접어들자 경찰이 입이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게 나를 맞았습니다. 그 반가운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영업 중인 자카르타 교통경찰

 

 

문제는 그게 10시 30분의 일이었다는 겁니다.

2018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처음 시행된 자카르타 도심 차량 홀짝제 운행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출퇴근 시간의 교통혼잡을 줄인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출근시간인 오전 6시부터 10시, 퇴근시간인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시행되었습니다. 그게 지난 8월초부터 부활한 것인데 당연히 홀짝제 시간이 끝났을 거라 생각한 시간에 경찰이 아직 단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부활된 홀짝제는 아침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적용된다고 경찰이 설명하더군요. 잘 알고 있는 제도라 생각하다가 허점을 찔린 겁니다. 매너리즘의 무서움이죠.

 

자카르타 주정부의 꼼수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홀짝제의 취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출퇴근 시간 교통혼잡을 완화한다는 것이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강력한 규제가 완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부활한 홀짝제는 혼잡완화보다는 이동제한에 초점을 둔 듯 했습니다. 그렇다면 규제를 완화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이 원래 그런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당연하지 않아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당하게 되고 지난 1년 반 아무 일 없었던 장소, 아무 문제 없었던 사람들을 평소처럼 가서 만나다가 코로나에 걸려 고생하게 되는 거라고요. 최근 몇 개월 사이 코로나에 걸려 중증으로 가거나 사망한 사람들도 지난 1년 반을 아무 문제없이 잘 지냈던 사람들이고 그동안 갔던 곳에 가고 그간 만났던 사람을 만나고  그간 했던 일을 했던 것 뿐인데 결과는 예상치도 않았던 코로나 확진으로 이어진 거였죠. 일상에서 벌어지는 변수들을 모두 상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경찰에게 돈을 뜯기면서 코로나도 이런 식으로 방심한 상태에서 걸리는 거겠다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디포네고로 왕자와 수디르만 장군이 목숨 바쳐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쟁취한 것은 저런 경찰들이 시민들 돈을 뜯어 자기 배만 부르게 하려 했던 건 아니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21.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