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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권력자 혹은 독재자의 특징

beautician 2021. 9. 2. 11:31

통치

 

 

 

기업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 역시 일종의 통치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장들, 소유주들의 성향이나 행동엔 군주들의 천태만상이 어느 정도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건 꼭 사장이나 대표이사들에게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고 법인장, 지점장, 부서장은 물론 노가다 십장이나 이병 후임을 맞은 일병들에게도 나타날 것 같습니다. 요컨대 부하를 거느린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요.

 

그리고 좋은 상사보다 돼먹지 못한 상사들이 많다고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들 사이에 인간말종들이 그토록 많이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통치를 당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한 경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민초들이 반발하는 것이고 높은 곳까지 오른 사람들은 정상에 오른, 또는 거기 근접한 사람들을 어떡하든 끌어내리려고 질투심과 시기심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일 터입니다.

 

어떤 방송에서 들었는데 통치자가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는 방식은 자비와 관대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기어오를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잔혹하고 무자비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부하들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붓고 때로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는 상사들, 부서장들, 사장, 회장들. 중대장, 연대장, 사령관들의 행태가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최고의 권력자라고 느끼는 일부 통치자들이 즐기는 특징적인 행동은 자신의 생리현상, 게으름, 인간말종의 성격을 거리낌없이 부하들 앞에 보이는 거라고도 합니다. 모 그룹 회장이나 로얄패밀리 일원이 조직 내에서 한 직원을 대놓고 왕따시키거나 폭행하는 것, 조폭들이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은 클래식한 행동 말고도 회의 석상에서 똥싸러 간다며 참석자들을 기다리게 하거나 부하들 앞에서 트림, 방구, 하품 같이 보통사람들 같으면 숨기는 게 미덕인 생리현상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침대 위에서 정장을 한 손님들이나 직원들을 맞는 상사나 귀족들. 이런 게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J사장의 행동이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회의하던 중간에 그가 똥싸러 간 게 여러 번이었고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예의가 있네 없네 따지면서 정작 줌미팅을 할 때면 자긴 런닝셔츠 차림에 면도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걸 보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나 싶었는데 그게 설명이 된 겁니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기사를 보내는 곳에서도 그런 통치행위 비슷한 것이 느껴집니다. 물론 언론사가 대놓고 무대포로 사람들에게 무례를 저지를 리 없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해외 통신원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해 전 세계 50개국에 통신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새로운 부장을 담당으로 앉혀 그들을 살갑게 대했습니다. 50명의 통신원이 모두 열심히 기사를 보낸 건 아니지만 해당 매체는 대체로 세계 각지의 뉴스들로 넘쳐나면서 풍성해졌죠.

 

하지만 매체 자신의 특장점을 만들어 유지하는 건 역시 비용이 드는 일입니다. 국제면이란 지면은 한정되어 있으니 통신원이 한 명이든 열 명이든 그 지면을 채우는 비용은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게 인터넷판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얼마든지 실을 수 있는 거죠. 온라인의 지면공간은 무한대라 할 수 있으니까요. 통신원들의 사기를 올려주면서 대부분의 기사들을 반영하자 내용은 풍부해졌지만 배정된 예산이 그만큼 기사 고료로 빠지니 담당 부장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데스크에 자유롭게 기사를 보내 놓으면 데스크가 취사선택하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일반 기자들처럼 오전 9시까지 발제하는 걸로 시스템이 바뀌었습니다. 3년 전 내가 처음 해당 매체 통신원을 시작할 때 신문사가 자기들 내부규정으로 만들어 놓은 발제-기사쓰기-데스크 송고-출고 등의 절차와 세부 방식을 전혀 몰랐고 누구도 친절하게 가르져 주는 사람도 없어 애를 먹었던 부분입니다. 그래서 발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대부분의 통신원들은 더 이상 기사를 보내지 못하게 되었고 그나마 발제를 넣는 사람들도 데스크에서 채택하지 않으면 그만인 겁니다. 결과적으로 통신원들 기사 송고가 대폭 줄어들게 될 것을 데스크나 본사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죠.

 

결국 매체는 그런 식으로 비용을 관리하지만 애써 모아 놓은 통신원들을 거의 다 잃고 말았습니다. 50명의 통신원들 중 러시아, 호주, 독일 통신원들 세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기사를 보내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 대신 몇 안되는 본사 국제부 직원들과 몇몇 특파원들이 나머지를 다 커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번 보여주기 식으로 인턴모집을 한 후 보여주기가 끝난 후 다시 비용절감을 추구하면서 인턴들에게 곤란한 환경을 조성해 스스로 손들고 나가도록 만든 셈입니다.

 

난 누군가에게 내 생리현상을 숨기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적이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남들 앞에서 욕설이나 폭력을 주저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지, 누군가의 인생을 가지고 논 적이 있었는지, 누군가를 은근히 어렵게 만들어 사표를 내게 한 적이 있었는지 더듬어 봅니다.

 

그런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걸로 봐서 난 통치나 경영엔 영 꽝인 모양입니다.

 

 

2021. 8. 25